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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왜구, 경제적 어려움 겪자 배 70여척 이끌고 달량진 점령■ 의병장 양달사 <2>
왜구의 노략질 막기 위해 민간인들 사이 매향신앙(埋香信仰) 성행
  • 글=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승인 2019.01.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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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 엄길리 철암산과 암각매향명 서호면 엄길리 철암산(鐵岩山)의 자연암반에 새겨진 ‘암각매향명’(보물 제1309호)은 21행 118자가 음각(陰刻) 돼 있다. 암각매향명의 조성 시기는 1344년(고려 충혜왕 5년)으로 국내 현존 매향비 가운데 연대가 가장 앞서고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탈로 전남 해안지역에서는 민간에서 매향신앙(埋香信仰)이 성행했다.

왜구의 잔인성과 매향신앙

왜구가 짓밟고 간 화(禍)를 명나라의 역사에 의하면, 1553년 8월 한 무리의 해적이 절강성에 상륙하여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 해적의 무리는 다시 절강 서쪽을 휩쓸고 지나가 안휘성 남쪽을 짓밟은 다음 남경에 육박하였다. 그 후 또다시 표양, 무석, 소주 등지에 상륙하여 절강, 안휘, 강소의 3성을 80여일에 걸쳐 유린하면서 4천 명 이상을 살상하였다. 이 해적들의 처참한 잔학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절강에 상륙한 일단의 해적들은 젖먹이 아이를 긴 장대 끝에 매달고 펄펄 끓는 물을 끼얹어 어린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르는가 하면, 임신한 여자를 잡으면 그 태아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내기를 걸고 즉석에서 임신부의 배를 갈라내기에서 이긴 자에게 술을 실컷 마시게 하며 흥겨워했다. 그들의 술자리에는 임신부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전라남도 해안지역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항상 왜구에 시달려왔다. 특히 도서를 포함한 복잡한 해안에 연해있는 영암 장흥 무안 강진 해남 완도 진도 등의 주민들은 왜구의 침입 경로에 해당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였다.

고려말기 진도군수는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생명과 재산의 안전지대를 찾아 1350년 고려 충정왕 때에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당시는 나주군 종남면)로 남은 주민들을 데리고 피난했다.

영산강을 따라 올라온 진도의 피난민들은 집단적으로 구릉지를 찾아 살기 시작했고, 월악리를 거점으로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현재의 송월 명월 월동 계동 중월 등 자연마을을 이루었다.
이들은 1906년 영암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기까지 약 550년을 시종면 일대에서 거주하면서 진도군 명산면으로 호칭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시종면 일대는 진도의 후예들이 많이 살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고려 말 왜구의 침탈로 인적 및 물적 피해가 가중되어 전남 해안지역에서는 민간에서 매향신앙(埋香信仰)이 성행하였다.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서 발굴된 암각매향명(岩刻埋香銘, 보물1309호)은 고려 충해왕 5년(1344)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매향신앙이란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하여 향나무를 몰래 바다에 묻고 불력에 의하여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하는 서원(誓願)으로 불교의 하생미륵신앙(下生彌勒信仰)이다.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암각매향비는 그 당시 왜구의 노략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을묘왜변과 영암전투

세종 때의 영암의 인구는 총 1천229명이며 호수(戶數)는 333호로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3년마다 인구조사를 하였으나 10세 이하와 노비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총인구의 절반이상이 총인구에서 제외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覺)에 의한 영암의 판도를 볼 때 내륙에 접한 지역뿐만 아니라 추자도 등 24개의 섬이 영암군의 행정 관할이어서 노략질이 극심한 당시로서는 도서지방에는 주민이 거의 거주하지 않았다. 

을묘왜변은 1510년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 왜란이후 조선 정부가 왜구와의 무역을 강력히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에 대한 무역선인 세견선(歲遣船:세종 때, 왜인의 교역을 허락하여 매년 일정수의 배를 우리나라에 보내게 한 일종의 무역선)의 감축으로 교역량이 줄어들면서 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받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대마도 등 일본의 서부지방에서 사는 왜구들이 1555년(명종 10년) 5월 배 70여척을 이끌고 먼저 우리나라 해로의 관문인 영암의 달량진(達梁鎭:현재 해남군 북평면 남창)을 점령하면서 발생한 커다란 왜변이었다.

1555년(을묘년) 5월 11일 왜선 11척이 달량진 해상에서 발견되었으나 13일 달량진과 이진진에 상륙할 때에는 달량진 밖에서 정박해있던 배까지 70여척으로 불어났고 왜구의 숫자는 6천여명에 달했다. 이 적선들이 이진포와 달량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 아래에 있는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하면서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이들은 더러는 호각을 불며 불을 놓고 더러는 창을 휘두르며, 칼을 빼들고 덤비므로 완도의 가리포 수군 첨사(僉使:종3품으로 현 여단장급) 이세린은 즉각 강진 병영의 병마절도사(兵使: 정3품현 사단장급) 원적(元績)에게 알리고, 자신은 성을 버리고 10리 밖 굴속에 숨어버렸다.

이세린은 군량미 100석을 싣고 도망하려다 이마저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달량진 사변의 급보를 들은 강진 병영의 절도사 원적은 군사 200여명과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급히 군대를 인솔하고 달량진으로 출진하였다. 이때 왜구들이 잠시 도망하자 원적이 성안으로 들어가 방어하였다. 왜구들의 무리가 다시 몰려와 성을 포위한지 사흘이 되어도 구원할 군사는 오지 않고 성안의 양식도 다 떨어져 갔다. 

그래서 절도사 원적은 화해를 청한 것만 못하겠다고 여기고 군사들로 하여금 의복과 갓을 벗어 항복을 표하는 모양을 보이도록 함으로써, 왜적들이 서로 돌아보고 날뛰며 사다리를 타고 성을 넘어 마구 들어와 드디어 성이 함락되었다.

원적과 한온이 모두 포위된 상태에서 원적과 한온 등 모든 군사가 살해되고, 이덕견(파면되어 귀양 감)은 항복을 청하여 살아서 돌아오면서 왜구가 “한양까지 범하겠다. 군량 30석을 내놓아라”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가지고 돌아와 전라관찰사 김주에게 보고하였고, 전라관찰사는 이덕견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문을 조정에 급보하였다.(명종 10년 5월 19일) 

이로 인해 조정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이 전라우수사(정3품으로 현 소장급) 김빈과 광주목사 이희손, 해남현감 변협 등이 뒤늦게 출전하였으나 연패했다는 소식에 조정 대신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세를 탄 왜구들은 진도의 급감포, 완도의 가리포, 강진의 마도진, 장흥의 회령포 외에 전라병영과 강진, 장흥 등을 분탕질했다. 해남읍성의 변협은 수성하였으나 다른 지역의 장수들은 성안에서 원적(강진 병영의 절도사)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해버렸다.

마을마다 들어온 왜구가 겨우 3~4명에 불과하였으나 대항하는 사람이 없어 해안가 진(鎭)과 고을들은 모두 텅비어 무인지경이 되었다. 왜구들은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관아와 민가까지도 불을 질러 서남해안은 일시에 아수라장이 되고 군량과 무기를 모조리 약탈당했다.

왜구들은 이렇게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에 나누어 싣고 아무 거리낌 없이 영암읍까지 돌진하여 영암향교에 들어가 진을 쳤다.<계속>

 

글=조복전 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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