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9>마한남부 연맹의 실체를 밝혀줄 서동설화(中)

견훤왕릉과 익산 대왕릉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후백제 견훤왕릉. 영산강 하구 쪽에서 세력을 키워 무진주를 거쳐 완산주에 이르러 후백제 왕국을 건설한 견훤왕은 백제뿐만 아니라 마한의 정통성 계승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아래 사진은 2018년 4월 전북 익산시 쌍릉(사적 제87호)의 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의 정체가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641)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서동설화에 나오는 무왕의 실체에 대해 삼국유사 찬자는 무왕을 ‘고본(古本)에는 무강’이라 하였지만 백제사에는 ‘무강왕’이 없으므로 잘못이라 하여 무강왕을 무왕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서동설화에 나오는 ‘무왕 출생 설화’는 원래는 ‘무강왕 출생 설화’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무강왕 출생 설화’를 추적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였다.

이를테면, 이병도 선생은 무강왕과 음이 비슷한 ‘무령왕’으로 파악하여 무령왕 이전 동성왕 대 있었던 신라와 백제의 귀족 간에 이루어진 혼인이 설화의 모티브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예전에는 이병도의 주장을 많이 따르기도 하였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연 스님의 주장대로 무왕 관련 설화로 보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나아가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이 혼인한 설화 내용이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의 반영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꽤 있다.

반면 서동설화에서 선화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난 후 황금을 얻어 잘 산다는 내용이 우리나라 곳곳에 전승된 ‘내 복에 먹고 산다’라는 민담의 한 형태 또는, 쫓겨난 공주가 어리석은 남편을 출세시키는 바보 온달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 볼 때, 서동설화는 사실(史實)의 기록이 아니라 무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신성시 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구전설화가 시대상황에 맞게 차용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서동설화의 원형은 마한 무강왕 설화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 금마군조에 “금마군은 본래 마한국이다. 후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해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이라 하였다. (중략) 후조선 무강왕과 비의 릉이 있다. 세간에는 말통대왕이라고 한다.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이라고 한다.”고 하여 무강왕의 무덤이 금마군 곧 현 전북 익산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익산군조에도 “미륵사는 용화산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이 인심을 얻어 마한을 세웠다. 하루는 선화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기 위해 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이 연못 속에서 나왔다. 지명법사를 찾아가 연못을 메울 방술을 물었더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으로 연못을 메워 이곳에 불전을 창건하고, 세 미륵전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움을 주었는데, 석탑의 높이가 여러 장(丈)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라 하여 미륵사 탑의 창건 설화가 실려 있다.

이렇듯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사서 모두 ‘무왕’을 ‘무강왕’이라 부르며, 무강왕이 마한을 건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관심을 끈다. 미륵사 탑을 세울 때의 설화는 삼국유사와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어 삼국유사를 참고하여 동국여지승람이 정리되었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그렇지만 삼국유사 찬자처럼 무왕이라 하지 않고 무강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무강왕’이 ‘무왕’보다 고본자료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서동설화는 무왕이 아닌 무강왕 관련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무강왕이 마한을 건국하였다는 기록

그런데 앞서 지적하였듯이 서동설화가 ‘남부여’와 ‘견훤’ 기사 사이에 배치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말하자면 견훤이 지렁이 아들이었다고 하는 건국설화가 대부분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항목 사이에 서동설화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곧, 무왕이 연못의 용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는 설화 내용은 무왕이 아닌 무강왕의 탄생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무강왕이 마한을 세웠다고 하는 것과 연결지어 보면, 마한의 건국 설화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지 석탑 사리 봉안기에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지적의 딸로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무왕 대에 미륵사 창건이 왕비가 발원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곧 미륵사 탑이 무왕부부가 발원하여 창건되었다는 서동설화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동시에 마한의 건국신화인 무강왕 탄생설화인 서동설화가 무왕 탄생 설화로 윤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왕이 무강왕 설화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무왕은 왕궁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익산지역으로 천도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고, 그곳에 거대한 미륵사탑을 세웠으며, 최근 발굴조사 과정에서 무왕의 무덤으로 확인되고 있는 쌍릉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사후에도 익산에 머무르려 하였다. 이렇게 무왕이 심지어 마한 건국설화인 무강왕 설화까지 차용하며 익산지역에 집착하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 무왕 때 신라인들이 백제를 가리켜 마한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응준’이라고 불렀던 것과 연결지어 볼 때 예사롭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렇게 무강왕 설화가 무왕의 설화로 부회된 까닭에 대해 무강왕을 무령왕으로 살피며 마한 사회가 백제에 통합된 이후, 그 세력이 성장하여 마침내 왕위까지 차지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마한계통의 정치세력이 왕위를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살폈다는 데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견해는 5세기말 이전에 마한이 백제에 통합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특히 무령왕은 중국 사서에 ‘부여융’이라는 뜻을 지닌 ‘여융(餘隆)’으로 나와 있어 부여씨 계통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다 무령왕릉조차 중국 남조 계통이어서 무령왕을 마한계통으로 연결지을 수는 없다.
 
백제와 마한의 대등한 통합


이 설화는 위에서 지적하였다시피 무왕이 마한계를 적극 끌어안고 있는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무왕이 마한계라고 한다면, 굳이 무강왕과 무왕의 이중성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서동설화는 마한계가 직접 왕위를 차지했을 가능성보다는 백제인들이 마한인과 통합을 시도하면서 그 지역의 원형 신화라고 할 수 있는 마한 신화가 백제의 국왕 신화로 수용되어 전승된 것으로 보는 것이 순리이겠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백제의 필요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이는 백제의 마한통합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복속’이 아니라 ‘대등한’ 수준의 통합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모습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좌우에 알렸다. 내가 삼국의 시원을 상고해 보건대,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발흥하였으므로 진한과 변한이 그에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육백여년이 되었다.”라고 하는데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 마한이 삼한 가운데 가장 먼저 일어났으며, 백제가 익산 즉 금마산에서 개국을 하였다는 내용인데, 견훤이 백제의 정통성뿐만 아니라 마한의 정통성 계승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알겠다. 만약, 마한이 일찍이 백제에게 흡수되고 역사상 그 존재가 미미했다면 굳이 마한의 정통성을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보다 마한의 정통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마한과 백제의 통합이 거의 동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한의 정통성 계승을 표방했던 견훤

견훤왕 31년(922)에 익산 미륵사의 개탑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또한 마한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견훤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 더욱이 견훤이 익산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곳이 왕도(王都) 사비와 비교되는 역사성에다 무왕 대에 있었던 마한신화의 수용과도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한다.

전남의 서남단 즉, 영산강 하구 쪽에서 세력을 키워 무진주를 거쳐 완산주에 이르러 후백제 왕국을 건설한 견훤왕은 누구보다 이 지역이 과거 마한남부 연맹의 정치체들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백제와 더불어 마한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했을 것이다.<계속>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