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5>양직공도(梁職貢圖)와 마한 왕국(下)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나주 복암 유적은 석실구조에서 백제 양식보다 왜나 가야의 영향력이 나타나고 있다. 그곳에 ‘응준’으로 상징되었던 정치체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는데 결국 6세기 중엽까지도 영산강 유역뿐만 아니라 해남·강진 일대, 그리고 섬진강 하류까지를 포함하여 전남 전역에 있는 마한의 정치체들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오른쪽 지도는 칼과 재갈의 분포도.

‘지미’와 ‘침미다례’의 연관성

양직공도에 보이는 백제의 ‘방소국(傍小國)’들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국내사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 무렵은 475년 고구려에 수도인 한성을 빼앗겨 그 중심을 충청도로 옮긴 백제가 남쪽의 전라도와 동남쪽의 경상도 지방으로 진출을 시도하려 몸부림치던 때였다. 가야와 마한의 제국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상호교류를 하고 있었고, 왜와도 활발한 교섭을 하고 있었다. 이들 나라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6가야, 포상8국(浦上八國) 등의 이름만 남아 있는데 반해, 일본서기 등 일본측 기록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국명들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방소국’에 언급된 나라 가운데 ‘사라(斯羅)’ 다음에 배열된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기문(上巳文)’, ‘下枕羅(하침라)’ 등은 섬진강 동쪽에 위치한 국가들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백제가 신라를 기준으로 앞부분에 배열한 나라들이 섬진강 이서지역의 가야영역에 해당하고 있는 것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뒷부분에 배열된 나라들은 아마도 마한의 영역이 아닐까라는 추정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 나라에 대한 일본 측 자료 또한 ‘반파’ 등 가야지역에 있는 나라들과 비교할 때 빈약한 편이어서 실체 파악에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다보니 그 위치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처음으로 양직공도 백제국사 자료를 분석하였던 이홍직 박사는 ‘지미’와 ‘마련’에 대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보이지 않는다며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최근에 이르러 ‘방소국’ 관련 기사를 주목한 연구자들 가운데 ‘지미’는 진서(晉書) 장화전에 보이는 마한의 20여 나라 대표단과 조공을 왔던 ‘신미국’과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미국’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침미다례’와도 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침미다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곧, ‘지미’는 마한 남부연맹의 강국으로, 백제 근초고왕과 맞섰던 ‘침미다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견해이다. 

일각에서는 고대 언어에서는 음과 훈의 사용례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하게 현대 한자의 음상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연결지으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지미’라는 나라 이름이 6세기 중엽까지 있었다면, 현재의 한자음이나 훈과 어떤 형태로든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게다가 815년에 편찬된 일본의 성씨계보를 기록한 ‘신찬성씨록’에 보면 백제에서 건너와 집단으로 귀화하였던 가문의 후예 가운데 ‘지미연(止美連)’이 ‘지미’ 지역 출신이 아닌가라는 의견이 있다. 이것이 방소국의 ‘지미’와 연결된다면 ‘지미’국은 분명히 존재하여 있었다고 하겠다.

‘상기문’이라 불렸던 정치체

필자는, 앞서 고대지명이 언어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침미다례가 음운상으로 침명현(해남), 훈독상으로 도무군(강진)과 비슷하고, 지리적으로도 고해진과 가까운 강진·해남 일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게다가 인근 송지면 군곡리의 거대한 패총, 삼산면 신금리 주거유적과 옥녀봉 토성유적, 장고산과 용두리에 있는 거대한 장고분 등의 존재는 이 지역이 적어도 기원전 후부터 4세기 중엽까지 강한 정치세력, 말하자면 침미다례 왕국이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실제 장고산 고분이 있는 해남 북일면, 용두리 고분이 있는 삼산면은 일찍이 행정구역이 강진이었고, 그곳과 해남 송지면 군곡리 패총이 있는 백포만 해안까지 불과 30여㎞ 정도 떨어져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강진만과 해남반도 일대가 침미다례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백제가 방소국 명칭에 ‘止美’ 대신에 ‘止迷’라 하여 아름다울 ‘美’ 대신 미혹할 ‘迷’를 사용한 것 또한 침미다례를 ‘남만(南蠻)’ 즉, ‘남쪽 오랑캐’라 하여 멸시한 것과 상통한다 하겠다. 이를테면 백제가 가야지역에서 그들과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였던 ‘가라’의 ‘반파(伴跛)’라는 이칭을 사용할 때 ‘叛波(반파)’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제일 앞부분에 배치하여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지미’의 한자 표현을 부정적으로 바꾸고 역시 앞부분에 배열한 것은 당시 마한남부 연맹의 강국으로 백제에 맞섰던 침미다례에 대한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마련’ 역시 일본서기에 나와 있지 않다하여 이홍직 선생은 위치 비정을 유보하였지만, 최근 들어 방소국 위치 비정을 시도한 이용현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지미와 마찬가지로 영산강 유역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마련 한자음과 백제 때 무주의 행정구역 관할에 있었던 ‘마로현(馬老縣)’이 비슷하고, 현재도 마로현과 음이 비슷한 마룡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전남 광양시 일대가 아닌가라는 의견이 많다. 실제 54국의 하나인 만로국이 이곳에 위치하였다는 의견도 있고 보면, 마련은 광양지역에 있었던 마한왕국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임영진 교수 역시 고고학적으로 광양만권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다고 언급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상기문’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에 ‘기문대사(己文帶沙)’라는 지역 이름이 나오는데, ‘대사’가 섬진강 하류의 하동지역에 해당하므로 기문은 그 근처 곧, 섬진강 하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기문’이라 하면, 기문의 상류에 있어야 하므로 지금의 남원 일대가 아닌가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보면 남원지역에 ‘상기문’이라 불렸던 정치체가 있었다고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5세기 후반들어 차령산맥을 넘어 전북지역으로 남하하던 백제는 노령산맥 이남진출이 강력한 마한남부 연맹체의 반발로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지리산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남원을 경유하여 섬진강을 통해 광양만으로 나아가려 했다고 본다.

그러나 상기문, 마련 등의 국가들이 아직 독자적인 정치체를 6세기 중엽 무렵까지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백제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6세기 중엽까지도 마한의 영역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가야세력이 이곳에 진출하였다고 하여 전북 가야사를 주장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을 전체의 상황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했다고 본다.

전남 전역에 마한의 독자적 세력 유지

‘하침라’에 대해서는 ‘침(沈)’과 ‘탐(耽)’이 통하기 때문에 ‘탐라’, ‘탐모라’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제주도를 생각하는 연구자가 적지 않으나, 필자는 이홍직 박사의 견해대로 강진 일대로 보고 싶다. 그렇게 보려는 중요한 까닭은 침미다례의 ‘침미’와 하침라의 ‘침라’가 음이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하침라는 침미다례 남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 되겠다. 하침라는 침미다례 옆에 있는 작은 소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498년 백제 동성왕이 광주지역에 내려왔을 때 조공을 하였다는 ‘탐라’가 바로 ‘하침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침미다례를 견제하려는 백제의 입장에서 하침라를 이용하려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침라는 침미다례 인근에 있는 연맹왕국으로 백제의 입장에서 침미다례 보다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제일 뒤에 배열하였다고 하겠다.

백제에 강력히 맞서 있는 가야지역의 ‘반파’를 방소국의 제일 앞부분에 배열한 것처럼 마한 남부 연맹의 대국으로 백제에게 맞서 일찍이 ‘남만’이라고 멸시의 대상이었던 침미다례 또한 미혹할 ‘迷’ 자를 사용하여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서, 마한남부 지역은 적어도 양직공도가 작성되던 6세기 중엽까지는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마한의 남부연맹 강국들은 섬진강 동쪽의 가야 연맹체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독자적 세력을 유지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498년 백제 동성왕이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을 핑계로 무진주까지 내려오자 놀라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위에서 살폈듯이 탐라가 하침라를 의미한다면 6세기 중엽까지도 하침라가 존속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전남 남부 일대에 그때까지도 백제의 복속과 관련이 없는 마한의 정치체들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복암리 유적을 보더라도 이미 살폈듯이 석실구조에서 백제 양식보다 왜나 가야의 영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에 ‘응준’으로 상징되었던 정치체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결국 6세기 중엽까지도 영산강 유역뿐만 아니라 해남·강진 일대, 섬진강 하류 일대까지를 포함하여 전남 전 지역에 있는 마한의 정치체들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겠다.

말하자면 백제는 차령이북 그리고 이제 전북일대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백제는 당시 중국과 연결되고자 하는 신라를 끌어들여 방소국 이름에 올리면서 동시에 백제와 대립관계에 있는 가야와 마한의 대국들을 방소국으로 칭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중국 양나라에 과시하려고 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같은 신찬성씨록에 나오는 ‘등미수’가 지미연과 같은 일족이라 하여 지미를 도미와 연결하여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도무군 동음현에 해당한다 하여 강진 일대로 비정하는 의견도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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