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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 국력을 과장하려는 백제의 의도가 있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4>양직공도(梁職貢圖)와 마한왕국(中)
양직공도 양직공도는 6세기 동아시아 최강국 양(梁)나라에 조공 온 외국 사신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중국 왕조에서는 관직에 임명된 인물은 요즘 증명사진 찍듯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러한 관례가 외국 사신에게도 적용되어 양직공도가 탄생했다. 현재 원본은 사라지고 없으며 모사본만 세 종류가 있다.

11월 23일 국회에서 전남도가 주관한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의 여명과 성립’이라는 학술 세미나가 열린다. 마한에 대한 지자체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은 긍정적이라 하겠다. 다만, 세미나에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마한의 백제’인지, 아니면 ‘백제의 마한’인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필자가 염려하는 현실이 반복되지는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6세기 전반 한반도 상황 이해자료

중국에서 가장 일찍 제작된 직공도이자, 현재 중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양직공도는 높이 25cm, 길이 198cm로 여러차례 표구된 비단 채색화로 전체가 아닌 일부만 남아 있다.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옆으로 접은 두루마기 그림으로, 내용은 외국사신이 양 황제에게 공물을 드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제기(題記)를 부가한 것이다. 제기에 양 보통(普通) 2년에 조공하러 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 21년(521) 무렵의 사실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곧, 521년부터 524년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양나라 화가 소역이 526년부터 541년까지 15년에 걸쳐 그렸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이 그림을 통해 백제와 양나라가 서로 깊은 우호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및 백제와의 교섭에 적극적이었던 양나라와 역시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던 백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 언급하였듯이, 여타 문헌에 전혀 나와 있지 않은 역사적 기록이 직공도의 ‘백제국사(百濟國使)’ 제기의 “旁小國有①叛波②卓③多羅④前羅⑤斯羅⑥止迷⑦麻連⑧上巳文⑨下枕羅 等 附之”라는 구절이다. 우리가 여태 알고 있었던 6세기 무렵에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 이외에 여러 국가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 국가들을 살핌으로써 한국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형성되리라 믿는다.

이제껏 우리가 인식하였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위 기록을 읽으려 할 때는, 기본적으로 521년 양나라에 입조하였던 백제 사신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백제의 시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방소국’ 백제의 치열한 외교적 고민

위 기록은 ‘백제 곁에는 小國이 있고(방소국), 이들은 백제에 부용하고 있으며(附之), 소국들에는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 등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백제가 이들 주변 아홉 나라를 ‘방소국’ 또는 ‘附之’ 곧 ‘부용국’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과거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 군대를 대파하고 남으로는 마한 남부연맹의 맹주 침미다례를 공격하는 등 군사적인 힘을 과시하였을 때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불과 몇 년 후인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가 신라에게 항복하고, 곧 이어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에게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어 주변국들에게 우월의식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불안정한 백제의 처지는 경쟁국인 신라나 가야, 심지어 섬진강 以西 지역의 여러 세력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하였던 마한남부 연맹 제국들과도 백제가 정치적 우위를 점하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설혹, 5세기말에서 6세기로 넘어가면서 동성왕, 무령왕의 왕권강화가 일정부분 성공을 하여 국력이 정비되었다고 하더라도 주변국을 ‘방소국’이라 부를 정도로 강력한 국가를 이루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음 호에서 다루려 하지만, 6세기 중엽 무렵, 백제의 지배력이 겨우 차령이남을 넘어서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백제가 주변국을 ‘방소국’이라고 지칭하였던 것은 그들이 한반도에서 강국이라는 사실을 과시함으로써 당시 고구려, 백제 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양나라에게 백제에 대한 보다 우호적인 시각을 갖게 하려는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러한 추측은 방소국에 속한 ‘사라(斯羅⑤)’라고 하는 신라의 옛 국호를 백제가 사용하고 있는 데서도 살필 수 있다. 신라는 지증마립간 4년(503년) ‘斯羅’에서 ‘新羅’로 국호를 바꾸었다. ‘斯羅’가 토착적 명칭이고, ‘新羅’는 새롭게 漢化된 이름인 셈이다. 백제사신이 양나라에 간 521년 무렵이면 이미 신라 국호가 ‘사라’에서 ‘신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斯羅’라는 국호를 굳이 사용한 것은 지증왕 때 국호를 정하고 ‘마립간’ 대신 ‘왕’이라는 칭호를 정하고 우산국을 복속하는 등 체제를 정비하고, 우경(牛耕)을 실시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등 비약적 발전의 기틀을 닦았던 신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특히 양서 신라전에 “그 나라(신라)는 작아서 스스로 사신을 보낼 수가 없으며, 대화할 때도 백제를 통해서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신라는 스스로 양나라에 사신도 파견하지 못하였고, 백제인 통역 없이는 중국언어를 이해하고 말할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백제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여 결코 백제의 ‘방소국’이 될 수 없는 신라를 ‘방소국’이라 하여 낮게 평가하면서 마치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섬진강 이서와 이동의 정치세력

한편 이들 아홉 국가에 관한 기록이 우리 측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 측 일본서기에는 자세히 다룬 기록들이 적지 않아 실체 파악에 도움이 되고 있다. 맨  앞에 있는 반파(叛波①)에 대해서는, 기문(己汶 섬진강 유역)의 땅을 둘러싸고 백제와 다투었던 ‘반파(伴跛)’가 분명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반파는 대가야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고령 지역에 비정되어 ‘가라(加羅)’라고도 불린다. 백제가 ‘伴跛’를 ‘반란의 물결’이라는 뜻을 지닌 ‘叛波’라고 지칭한 것은 백제와 이렇듯 맞서는 등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탁(卓②)’은 일찍이 이홍직 선생은 대구지역으로 비정하였지만, 아무래도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탁순국(卓淳國)’이 분명하므로 창원지역으로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탁순국은 일찍부터 왜와 통교하였으며, 4세기 후반 백제는 이 탁순국을 매개로 하여 왜국과 처음 통교를 했었던 만큼 백제에게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다음 ‘다라(多羅③)’ 또한 일본서기에 보이는데, 현재 합천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역시 가야영역이다. 그리고 ‘전라(前羅④)’는 일본서기에 있는 ‘안라(安羅)’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함안 곧 안라가야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방소국으로 지칭된 ①~④의 네 나라는 모두 섬진강 이동 내지는 가야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의 지배와 관련이 있는 지역도 아니었고 ‘반파’, ‘다라’와는 당시 대립하는 구도였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언급된 방소국들이 백제사신과 동반하여 양에 갔는지 의문이 남는다. 말하자면 백제사신이 양에 가서 자신들의 ‘방소국’이 이러한 나라들이 있노라고 자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가야지역에는 6세기 중엽 무렵까지 여러 정치체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신라를 사이에 둔 ⑥止迷⑦麻連⑧上巳文⑨下枕羅 등에 대해 섬진강 이서에 있는 마한 연맹체들이 아닌가하고 추정하고 있다. 곧, 백제는 신라를 사이에 두고 섬진강 이동과 이서의 국가들을 방소국으로 나누어 배치한 셈이다. 말하자면 백제가 두 집단을 별개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살필 수 있겠다. 이제 마한지역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나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계속>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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