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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C 중엽에도 전남지역에 독립 왕국들이 있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3>양직공도(梁職貢圖)와 마한왕국(上)
남원 유곡리 고분 가야계통으로 추정된 유물이 출토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전북지역도 가야의 세력권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이른바 ‘전북 가야론’이 제기돼 마한사 영역이 얼마나 위축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속도를 내고 있는 가야사 복원사업

앞서 영산지중해 중심의 마한왕국을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써야 함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인다. 남원과 순천 등 섬진강 주변에 보이는 일부 가야계 유물을 가지고 가야세력이 이곳까지 진출하였다는 증거라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게기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을 강조함에 따라 가야사 조사·연구 및 정비사업이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면서 관련사업들이 다시 탄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섬진강 연안 일대는 물론 전남·북 내륙지역까지 가야영역으로 확대시켜 살피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가야계통으로 추정된 유물이 출토된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을 가야 유적지 중에 호남지역 최초로, 국가사적 542호로 지정하는 등 현 정부의 국정과제가 본격 추진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북지역도 가야의 세력권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이른바 ‘전북 가야론’을 전북 지역 국립대에 재직하고 있는 연구자가 주장하고 있는 형국이 연출되고 있다. 마한사 영역이 얼마나 위축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제 전북일대가 마한사가 아닌 가야사에 편입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머지않아 ‘전남 가야론’ 주장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아직도 ‘마한의 백제’가 아닌 ‘백제의 마한’이라는 늪에서 빠져 나오고 있지 못하고 있는 등 마한 중심의 한국 고대사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섬진강 일대는 점이지대였다

하지만 섬진강유역인 전북 남원과 순창, 그리고 전남 곡성 등지에 마한지역의 분구묘라고 할 수 있는 대형 ‘말(馬)무덤’이 분포하고 있는데 반해, 가야계통의 중대형 고총들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섬진강유역에 가야계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는 의견이 있다.

섬진강유역은, 마한문화를 기반으로 백제와 가야문화가 공존하는 문화상으로 보면 일종의 점이지대(漸移地帶)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섬진강 일대에 보이는 가야계 흔적들은 교류의 산물이지 정치적 복속의 상징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가야 세력이 섬진강을 넘어 전남지역까지 진출하였다고 하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전북 가야론’과 같은 무리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의 마한지배가 369년 근초고왕 때라고 하는 주장이 아직 교과서에 남아 있고, 그것에 바탕을 둔 공무원 시험 및 대학수학능력시험 등에 그와 관련된 문항들이 여전히 출제되고 있지만, 지난 호에 언급하였듯이 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4세기 후반 백제의 마한설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는 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백제 동성왕 20년(498) “탐라가 조공을 내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자 정벌을 중단하였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에 주목하여 무진주, 즉 지금의 광주일대가 늦어도 5세기 말에는 백제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5세기 후반 전남내륙 일대가 사실상 백제의 영향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영산강유역의 고분구조 등 고고학적 유물을 보면 백제계 고분 양식보다는 재지적인 특성에다 왜 또는 가야와 교류를 하며 새롭게 형성된 특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심지어 ‘응준’으로 명명되었던 나주 다시들 지역의 왕국이름이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 때까지도 백제를 대변하는 집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동성왕 때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주장이 과연 사실일까? 라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특히 521년, 즉 무령왕 말년에 해당하는 시기에 중국 양나라에 간 백제 사신 일행을 그린 ‘양직공도’라는 그림 해설에 백제와 신라가 아닌 다른 나라 이름이 백제 주변에 있었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의문에 힘을 보태주고 있다. 말하자면 6세기 전반까지도 적어도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정치세력들이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채 독립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살핌으로써 6세기 마한 연맹왕국의 구체적인 모습을 문헌을 통해 확인해보려 하는 것이다.
 
양직공도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해야

양직공도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사진이 실려 있는데, 백제와 양(梁), 즉 중국 남조와 백제의 외교관계를 설명하는 근거라고 시험에 자주 출제되었던 기억을 지닌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 그림 해설에 부기된 당시 마한의 연맹왕국 국명들은 6세기 중엽 마한남부 연맹의 실체뿐만 아니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백제의 마한 지배시기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달 전, 이와 관련된 학술 세미나가 전남대에서 열려 그 실체를 밝히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은 다행으로 생각한다.

원래 '직공(職貢)'이란 중국 주나라에서 봉건 제후들이 천자에게 의례적이고 의무적인 조공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을 '직공도(職貢圖)'라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직공도 가운데는 중국 남조 양나라에 조공왔던 각국 사신들 용모를 그리고, 그림 옆에 해당 나라의 여러 사정을 기록한 양직공도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그림 역시 원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모본(摹本)만 4종이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1077년 송나라 때 모사되었던 양직공도북송모본이 원본에 충실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 그림에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던 12개국 사신의 용모와 13개국의 사정이 기록되어 있어 복식사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직공도에 백제사신 그림과 그림을 해설하는 설명에 다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백제 방소국(傍小國) 곧 백제 옆에 있는 소국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와 더불어 백제의 주변국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곧 ‘백제는 예전에 마한에 속하였다’라는 내용을 시작으로 모두 198자의 글자가 적혀 있다. 여기에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양사(梁史)’ 백제전에 기술되어 있지만, 방소국 관련 부분인 ‘旁小國有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巳文下枕羅等附之’라는 구절은, 양사 백제전을 비롯하여 다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양직공도가 작성된 시기에 대해 521년 이후부터 524년, 또는 521년부터 537년 사이에 제작되었다는 의견들이 있으나 521년부터 524년 사이에 작성되었던 백제국 사신 이야기가 양직공도를 작성할 때에 실리게 되었다는 견해를 따르고 싶다. 어느 주장을 따르든 간에 521년 무렵, 즉 백제 무령왕 당시의 한반도 사정을 알려주는 것임에 분명하다.

‘백제 옆에 있는 소국’ 즉 ‘방소국’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 당시까지 백제 주변에 여러 국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현재 이들 국가들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이들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지미’, ‘마련’, ‘하침라’ 등이 전남지역에 위치하였다고 하는 데에는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말하자면 전남지역에 521년 무렵에 백제에 복속되지 않은 왕국들이 여럿 있음을 알 수 있겠다. 특히 ‘∼ 等’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이들 나라들 외에도 다른 국가들도 더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이들 ‘방소국’이라 언급된 왕국들의 실체를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마한연맹 왕국의 실체 파악은 물론, 6세기 중엽 백제와 마한, 그리고 한반도 남부지역의 정치체들의 세력관계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계속>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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