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암의 노랫말을 찾아(4)
월출산, 서호강, 몽해뜰 등 영암의 향토색 짙게 배어나

월출산 신령님께 소원 빌었네
천황봉 바라보며 사랑을 했네
꿈 이뤄 돌아오마 떠난 그님을
오늘도 기다리는 낭주골 처녀
노을지면 오시려나 달이 뜨면 오시려나
때가 되면 오시겠지 금의환향 하시겠지

초수동 범바위에 이름 새겼네
영원히 변치말자 맹세를 했네
용당리 나룻배로 오실 그님을
단장하고 기다리는 낭주골 처녀
노을지면 오시려나 달이 뜨면 오시려나
때가 되면 오시겠지 금의환향 하시겠지 

월출산, 천황봉, 낭주골, 초수동, 용당리 등 영암 사람들의 귀에 너무나 익숙한 낱말이 들어간 이 노래는 국민가수 이미자가 불렀던 ‘낭주골 처녀’다.

‘낭주’는 고려시대에 영암의 옛 지명으로 1972년 영암(낭주)의 처녀를 소재로 하여 전순남 작사, 박춘석이 작곡한 대중가요다. ‘낭주골 처녀’는 가수 이미자가 서른세 살 때 부른 곡이다. 한국 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천152곡이 등록된 ‘히트곡 제조기’이자 대중 가요계의 거목인 작곡가 박춘석(1930~2010)의 작품이기도 하다. 박춘석과 가수 이미자가 호흡을 맞춰 발표한 곡은 무려 700곡이 넘는다. 1960년대 들어서는 주로 트로트를 발표했는데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등에 이어서 1972년에 ‘낭주골 처녀’를 음반으로 발표했다. 박춘석의 30주년 기념음반 ‘노래는 나의 인생’에 이미자의 ‘낭주골 처녀’도 포함돼 있다.

이처럼 국내 가요계의 거장인 이미자-박춘석 콤비가 영암을 배경으로 한 ‘낭주골 처녀’의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이다. 작사가 전순남의 경우도 가요계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낭주골 처녀’가 유일한 작품으로 보인다. 영암출신 누군가 가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한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보더라도, 197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이농현상 바람이 거세게 불었는데 농촌인 영암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무렵 영암 서부권에 사는 청년들은 주로 삼호읍에 있는 용당리 선창에서 나룻배를 타고 목포로 건너간 다음 목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다. ‘용당리 나룻배로 오실 그님을’이라는 대목은 바닷길을 따라 목포로 통하는 당시 영암 서부권의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즉 ‘낭주골 처녀’는 서울로 떠나간 총각을 애타게 기다리는 영암처녀들의 마음을 표현한 노래로, 작사가 전순남은 당시 영암의 시대상황과 정서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영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월출산 기찬랜드에 건립된 ‘하춘화 노래비’ 앞에서 가수 하춘화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후렴]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야
달을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지화자 좋구나
서호강 몽햇들에 풍년이 온다
[후렴]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야
달을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흥타령
부네 흥타령 부네
목화짐 지고 흥겹게 부네
용칠 도령 목화 짐은 장가 밑천이라네
[후렴]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서와 데야
달을 보는 아리랑 임 보는 아리랑

영암을 대표하는 대중가요는 이미자가 노래한 ‘낭주골 처녀’와 함께 하춘화가 부른 ‘영암 아리랑’이 손에 꼽힌다. 특히 ‘영암’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영암 아리랑’은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정선 아리랑’과 같이 지역을 노래한 대표적인 아리랑 노래다. 노래의 소재가 된 배경은 달이 뜨는 월출산(月出山)을 비롯하여 서호강(西湖江), 몽해뜰 등 역시 영암지역의 지명이 향토색을 짙게 띠고 있다. ‘낭주골 처녀’와 비슷한 시기인 1972년 10월 지구레코드사에 의해 발매된 ‘영암 아리랑’은 가수 하춘화가 열일곱 살 때 불러 대중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영암 아리랑’은 하춘화의 대표적인 명곡으로 지금도 하춘화는 ‘효(孝) 콘서트’에서 빼놓지 않고 부르고 있으며, 특히 영암군의 행사나 영암사람들이 모인 공연에서는 필수코스로 부르고 있다. 2011년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하춘화는 SBS TV ‘여유만만’에 출연하여 1961년 여섯 살에 가수로 데뷔하여 총 2천5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 가운데 베스트 3위로 ‘영암 아리랑’을 꼽기도 했다.

하춘화는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고향이 곧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아버지 하종오(101)씨는 학산면 금계리 계천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춘화는 지난해 아버지의 고향에서 동료연예인들과 함께 백수잔치를 열기도 했다. 연예계에선 소문난 효녀로 알려진 하춘화는 방송에서 ‘영암 아리랑’을 부르게 된 사연을 말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더욱 열심히 불렀다고 한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생활한 하춘화의 아버지 하종오씨는 딸이 유명가수가 되자 고향을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하여 직접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당초 백암 작사, 고봉산 작곡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하종오씨가 노랫말을 지었다는 것이다. 작사자 백암(白庵)은 당시 MBC사장이었던 이환의(88)씨가 신분 노출을 까려 가명으로 발표했다가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다.

서호출신의 이환의 사장은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다 30대에 전라북도 도지사를 지내고 1971년부터 1980년까지 MBC와 경향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하종오씨는 고향의 노래 ‘영암 연가’를 만들어 딸 하춘화에게 부르게 하려고 MBC PD에게 말했는데 당시 사장이었던 이환의씨가 보고를 받고 ‘영암 연가’를 개사하여 레코드사를 통해 ‘영암 아리랑’으로 취입토록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환의 사장 측은 당시 영암향우들이 ‘영암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들이 많았고, 그래서 가사를 만들어 레코드사 사장에게 부탁하여 노래음반을 만든 것이 ‘영암 아리랑’이었다는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어찌됐든 ‘영암 아리랑’은 작사를 둘러싼 다소 불편한 진실로 논란이 있지만, 두 분 모두 고향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70년대 MBC 등 방송을 통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됐고, 가수 하춘화도 유명세를 더욱 떨치며 영암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성공한 가수 하춘화는 아버지의 권유로 낭주중학교 설립에 기여를 하는 등 아버지의 고향, 영암과의 끈을 이어가며 ‘영암 사람’으로 지역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이에 영암군은 지난 2010년 월출산 기찬랜드에 ‘영암 아리랑’ 노래비를 세워 기념하고, 한국트로트가요센터건립을 통해 지역의 관광산업 도모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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