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보 형제봉 만세사건…86년 만에 명예회복
일제에 맞선 ‘영암농민항일독립운동’ 재조명

1932년 6월 4일 영보 형제봉에서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주민수탈 정책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항거하다 옥고를 치렀던 6명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게 됐다.

이른바 ‘영보 형제봉 사건’이 ‘영암농민항일독립운동’으로 86년 만에 명예회복을 하며 마침내 재조명 받기에 이르렀다.

영암농민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최윤호)는 14일 영암문화원 2층 회의실에서 가진 회의에서 “오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영보 형제봉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던 여섯 분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게 됐다”고 밝혔다.<사진>

포상 내용은, 건국 포상에 ▲최병수(당시 27세) ▲최판열(당시 23세) ▲최동림(당시 26세) ▲신용주(당시 29세) 그리고 대통령 포상에 ▲신용점(당시 24세) ▲신일선(당시 31세) 등 6명이다. 건국 포상을 받은 최병수씨는 지난 2015년 일본 대사관 앞에서 분신한 고 최현열 열사의 부친이다.

이들은 올해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벌인 재심사에서 명예회복을 하게 된 것으로, 영보 형제봉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극심한 고초와 옥고를 겪었지만 그동안 서훈심사에 대부분 보류돼 왔다.

영보 형제봉 만세운동은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농민독립항쟁 사건으로 150여명이 경찰에 체포 연행됐다.

이들은 1년 후 사건의 중요성과 많은 인원으로 관할인 장흥지원이 아닌 목포지방법원에서 74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최고 5년에서 최하 벌금 20원까지 65명이 1심 판결을 받았다. 또 이 중 34명은 고등법원에 제소하여 대구형무소로 이감돼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농민독립항쟁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이 사건내용과 규모를 의도적으로 축소시켰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 회장은 “영암농민항일독립운동은 광주학생독립운동과 비밀청년회, 야학교육, 신간회, 농민회 등 조직과 연계된 항쟁사건으로 항일을 위한 사상적 고취를 수행한 항쟁사건으로 당시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사건이었다”고 설명한 뒤 “90여년 만에 명예회복의 염원이 시작된 것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 회장은 이어 “새롭게 여섯 분이 정부 포상을 받아 대단한 영광이다. 전 정권 때 40~50분이 보훈청에 유공자 신청을 낸 적이 있지만 한국전쟁 때 공산 측 부역사실로 거절됐다. 현 정부에선 당시 침략을 못 막은 것은 정부의 책임이고 부역은 당사자가 살아남기 위해 한 것이기 때문에 독립 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다”면서 “부역이라는 낙인이 사라지면서 많은 걸림돌이 해소됐다”고 밝혔다.

영암농민항일독립운동김념사업회와 유족회는 지난 7월 창립돼 선열들의 고귀한 뜻과 희생의 항일역사를 재조명하는 한편 애국·애족정신 함양과 민족정기 선양 및 계승을 위한 제반사업을 추진하고, 정부의 개선된 보훈방침에 따라 유족들의 서훈신청에 더욱 주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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