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1>마한 산악신앙의 상징, 월출산 산천제(下)

이번 마한축제에서 필자는 남해신사에서 해신에게 제를 올릴 때 어떤 희생을 제물로 사용하는지를 관심 있게 보았다. 필자의 예상대로 소머리가 제단에 올려 있었다.

앞서 필자가 자세히 다룬 바 있듯이, 마한 연맹왕국은 사슴을 희생으로 사용한 백제와는 달리, 소나 말을 희생으로 사용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왔다면 소머리를 희생으로 사용할 것이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의 전통을 구조적으로 분석한다면, 기록이나 유물이 부족하여 잘 알 수 없는 고대사회를 복원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산 정상부 제, 삼국유사 등 문헌에도

구정봉을 거쳐 정상인 천황봉에 오르며 주위를 둘러보면 넓은 평야는 물론 다도해, 심지어 제주도까지 한 눈에 보이는 우리나라 서남부 지방에서 가장 높은 명산 월출산은 일찍부터 서남해를 거쳐 영산지중해를 드나드는 수많은 국내외 선박들의 등대역할을 하였을 법하다.

말하자면 지정학적으로 다른 명산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숭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하늘과 가까운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신령이 내려와 정좌하여 있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월출산과 같은 명산이 일찍부터 주목이 대상이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월출산의 정상부에 제단을 만들어 산신께 제를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에서 살필 수 있다.

삼국유사 심지계조(心地繼祖) 편을 보면, 신라 말 헌덕왕 때 대구 동화사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바위 밑으로 돌아가 엎드려서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때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부처님과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지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아간다.” 중악의 신이 산 정상부에 깃들어 살면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산 정상에 제단을 지어 산신에게 제를 올리게 하였다고 본다.

고려시대에도 경주에 있는 동악의 신사도 산 꼭대기에 위치하여 있었고, 개경의 송악신사와 적성현의 감악신사 역시 산마루에 있었고, 정주의 백마산 정상에 치제를 위한 단이 있는 등 산악신사들이 대체로 산 정상에 입지하여 있는 것도 이러한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들 토함산, 송악, 감악, 백마산 등은 모두 국가 제장이었다.

이와 같이 산 정상에 사당을 설치한 일은 고려이전 시기에도 이미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동악에 해당하는 토함산이 중사로 편제되었던 것이 통일신라시대였기 때문에 짐작할 수 있다. 토함산의 중악신사는 신라 건국 시조의 한 사람인 석탈해를 모시는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토함산에서 열리는 산천제는 통일신라 이전 즉 신라시대부터 있어왔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겠다. 이렇게 살피면 통일신라 때 소사에 편입되었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월출산 산천제는 통일신라 때 신라정부가 주관하는 제가 행해졌을 것이지만, 그 기원은 훨씬 이른 마한시대부터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천황봉 유적, 고려시대 때 국제행사 확인

월출산에서 산신에게 제를 지내는 제단이나 신사가 일찍부터 있었다고 하는 문헌기록을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해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어 관심을 갖게 한다.

1996년 목포대 박물관이 영암군의 후원을 받아 월출산 정상인 천황봉 부근을 발굴조사를 한 결과, 제사와 관련한 유구는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관련 유물들을 적지 않게 수습하였다. 이들 유물을 통해 월출산 정상에서 행해진 산천제의 의미를 더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출토유물 가운데 의례용기로 보이는 토기, 자기 및 토제馬, 철제馬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9세기 무렵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된 향로 뚜껑 등이 있어 통일신라 시대에 월출산이 소사에 편입되어 정상에서 국가에 주관하는 제가 행해졌다고 하는 문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려 전기에 해당하는 10∼11세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믿어지는 해무리굽 청자, 11∼12세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순청자와 녹청자, 그리고 13∼14세기의 상감청자 등 향을 피우고 주찬(酒饌)을 올리는 데 쓰이는 잔탁, 향완, 향로, 정병 등 유물들이 많아 고려시대에도 이곳에서 산신제가 거행되었음을 알게 한다.

특히 청자로 만든 제기들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비록 국가 사전체계에 편입되었다는 기록이 없다고 하더라도 고려시대에도 통일신라 시대처럼 국제가 행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월출산 청자유물, 계층주체 다양성 알려줘

한편, 월출산 유적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청자유물 가운데 고급청자 제품이 대부분이지만, 품질이 낮은 녹청자로 만든 제품 또한 적지 않게 나왔다. 이를테면 순청자 제품으로는 대접(83점), 접시(87점), 잔(28점), 잔탁(13점), 합(12 점), 병(17점), 발(1점), 완(39점), 향로(5점), 향완(1점), 방형대(1점), 마상배(1점) 등이 출토되었고, 녹청자 제품으로는 대접(19점), 접시(53점), 잔(2점), 합(2점), 병(162점) 등이 출토되었다. 순청자와 녹청자의 제작시기가 대략 11세기∼12세기의 것으로, 비슷한 시기에 같은 기종의 제기를 서로 다른 재질로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동일한 제사에서 재질이 전혀 다른 제기를 혼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순청자와 녹청자 제기를 각기 사용하였던 제사가 별도로 행해졌던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곧 같은 제장에서 서로 다른 재질의 제기가 사용된 것은, 제사 주체가 서로 달랐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를테면 고급스런 순청자는 월출산 천황봉 신사에서 국가주도의 제의가 행해질 때 사용되었던 것이고, 녹청자는 고을주민들이 주도하여 제의를 행할 때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제가 거행되었던 제장에서 동시에 민간에서 주관하는 제의가 행해졌던 사례는 개경의 송악, 장단의 감악, 경주 서악 등 여러 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예컨대 일반 백성들도 재난이 있거나 질병이 생기면 옷, 良馬를 바치고 기도를 하였다는 송악신사의 사례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여하튼 월출산 천황봉 출토자기를 통해 같은 제장에서 같은 산천신에게 국가 또는 일반 백성들이 각기 제의를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곧 월출산 산천제는 이 지역 모든 백성들의 주된 신앙 공간이었던 셈이라 하겠다. 아울러 동일시기의 같은 장소에서 재질이 다른 자기의 출토를 통해 제사 집단의 차이, 신분적 차이, 지역적 차이에 따른 유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철마신앙은 말을 희생으로 삼았다는 사실

한편, 월출산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토제馬 11개와 철제馬 3개가 있어 주목을 끈다. 토제마 가운데 5점은 몸체나 안장 및 부속품을 비교적 잘 표현하였으며 안장도 따로 만들어 붙였다. 3점의 토제마는 안면이 평면형이고 다리가 짧으며 세부적 표현은 생략되어 있다. 나머지 3점은 앞의 5점에 비하여 크기가 작으며 세부표현은 크게 생략하였다. 철제마 가운데 2점은 안장을 표현하고, 말의 목이 몸체와 수평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나머지 1점은 안장을 생략하였고, 목을 세운 형태이었다.

토제 말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 제작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말하자면 이곳이 마한 이래로 오랫동안 산천제가 행해진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입증해주거니와 만약 삼국시대의 유물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이곳에서 삼국시대에 이미 제의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부안의 죽막동 유적의 출토 토제말 등이 5세기 무렵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참고하더라도 월출산 정상부에서 출토된 토제마의 제작시기 역시 그보다 늦을 이유는 없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모형 말을 제작하여 제물로 사용하는 경우를 죽막동 유적 외에도 신안 흑산도 상라산 유적과 여수 묘도 봉화산 유적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산악지역이나 도서연안 곳곳의 제사 유적지에서 철마가 발견되는 곳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며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포구를 배경으로 활동하던 이곳 사람들이 안전한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는 믿음에서 말의 형상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것이라 하겠다. 이들이 말을 희생으로 삼았던 것은 말은 빠름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신에게 빨리 다가가기 위함이라거나 군사를 상징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영산지중해를 중심으로 마한남부 연맹지역에서는 군사적 목적보다는 소나 말을 희생으로 삼았던 전통과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진다.

결국 월출산 천황봉의 제사유적은 남해포의 남해신사와 함께 고대 마한인들의 다양한 제의 형태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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