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0>마한 산악신앙의 상징, 월출산 산천제(上)

월출산 천황봉 고대 마한 왕국시절 연맹의 중심지였던 영산지중해가 눈앞에 펼쳐지는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월출산은 일찍부터 산천제를 지내기에 매우 좋은 장소로 무사항해와 기우제 등의 제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남해포의 남해신사가 해신을 위한 신당의 기능을 하였다면 월출산의 신사는 산천신을 위한 사당 기능을 했다.

월출산 산악신앙은 마한 이래 최고

지난 주 시종면 남해포 일원에서 열린 마한축제는 복원된 남해신사에서 해신에게 제를 올리는 의식부터 시작되었다. 남해신사는 우리나라 해신 사전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 신사가 세워진 것은 이제껏 이해되고 있는 고려 현종 때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른 마한 시대부터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한축제를 남해신사와 연결 짓고 있는 것이 그 이유라 하겠다. 남해신사 사당 앞의 안내문에는 고려 현종 때 남해신사가 처음 세워졌다는 설명이 있다.

그렇게 되면 마한축제와 남해신사의 연결 고리가 상실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 축제와 더불어 개별 사실에 대한 객관적 실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앞서 이야기 한 바이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전북 부안의 죽막동의 해신당 유적과 비교하여 볼 때, 공간적으로는 동아시아 해양교역의 중심지에 세워져 있다는 상징성과 함께 고대 마한 시기부터 현재까지 해신제가 이어져 왔다는 역사성 측면에서 남해신사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

명산대천의 산천제, 국가에서 중시

고대 마한왕국 시기에 남해신사나 죽막동의 해신당처럼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의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해신당이 주요 항·포구에 있었던 것처럼, 주요 명산의 정상에도 산신을 위한 산악신앙이 일찍부터 있어 왔다. 해신당이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면, 산천 제의는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는데, 그곳을 천신이 하강하는 장소라 여겼기 때문에 신성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명산대천에서 행하는 제의를 마한시대에도 소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연맹왕들은 매우 중시했을 법하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고구려는 3월 3일에 하늘(天)과 내(川)에 제사를 지내고 백제의 국가 제사에 천지 제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언급에서 당시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마한 연맹왕국도 국왕 주관의 제천행사가 명산대천에서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겠다.

이러한 모습은 통일신라에 들어서서 보다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통일신라 시기에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의식을 정비할 때, 사전체계에 편입된 제의들이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에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다. 그 가운데 “사전(祀典)에 나타난 것이 국내의 산천뿐이다”라 하여 산악신앙이 신라 사전체계의 핵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3山5岳 이하 명산대천을 大, 中, 小祀로 분류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통일신라 때 월출산과 무등산 小祀에 편입

이러한 입장에서 이루어진 신라의 사전체계 정비는 신문왕 5년(685년) 9주의 지방행정 체계를 정비한 이후부터 시작되어 경덕왕 이전에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가령 지금의 전남지역에 무진주가 새로이 통일신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성되는데, 그 치소가 있는 현재의 광주광역시에 있는 명산 무등산의 옛 이름인 무진악에 ‘소사’를 두었다고 하는 것에서 적어도 무진주 편성 이후에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월나군에 있는 월나악 곧 현재의 월출산을 역시 ‘소사’에 편성하였다고 삼국사기에 무진악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월나군’이라는 지명은 백제 때부터 사용되다 경덕왕 때 이르러 현재의 ‘영암’ 지명이 나온 것임을 상기하면, 월출산에서 행해지는 제의가 경덕왕 이전에 ‘소사’라는 사전체계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여기서 ‘월나악’ 등을 소사에 편입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때 처음으로 제의를 주관하는 신사가 설치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그곳에 하늘에 제의를 지내는 의식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이전부터 있었던 곳에다 국가가 사전체제로 편입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신라 때 ‘월나악’, 고려 때 ‘월생산’이라 불렀던 월출산을 이미 조선초에 ‘소금강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반도 남부의 명산 중의 명산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고 있고, 필자 또한 글의 착상을 얻기 위해 최근들어 자주 산을 오르고 있지만, 고려시대 유명한 문인 김극기가 월출산을 올라 등반기를 남길 정도로 수많은 인사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찾았던 유서 깊은 산이었다.
 
영암의 역사적 위치, 월출산의 사전편입

고대 마한 왕국시절 연맹의 중심지였던 영산지중해가 눈앞에 펼쳐지는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월출산은, 일찍부터 산천제를 지내기에 매우 좋은 장소였을 법하다. 영산지중해를 비롯하여 서남해를 항해하는 수많은 선박들의 무사항해를 기원하거나 가뭄에 비를 바라는 기우제 등의 제를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호에 살필 신사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살필 수 있는데, 남해포의 남해신사가 해신을 위한 신당의 기능을 하였다면, 월출산의 신사는 산천신을 위한 사당 기능을 하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남해신사에서 해신제를 지낸 것처럼 마한시대에도 연맹왕국 차원에서 월출산에서 산천제가 성대하게 치러졌을 것이라 믿어진다.

이러한 역사적 전통이 백제시대를 거쳐 통일 무렵까지도 계속되었기에 전남지역의 많은 명산대천 가운데 무진악과 더불어 월나악이 사전체계에 편성된 까닭이라 여겨진다. 무진악은 당시 통일기에 국가에서 의도적으로 키운 무주의 치소에 있는 명산이기 때문에 사전체계에 편입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당시 신라의 수도 경주와 많이 떨어져 있는 월나악에 굳이 사전을 설치하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한다.

더구나 백제 멸망 후 마한의 심장부에 위치한 영암지역은 다른 백제지역의 고지(故地)보다 토착적 전통을 간직하면서 독자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도 월출산에 사전이 설치된 또 다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앞서 살핀 바 있지만 동국여지승람에 월출산 이름과 관련이 있는 ‘動石’ 관련 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월출산 구정봉 밑에는 바위가 셋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가 한 장이고, 둘레는 10여 위가 되는데 서쪽으로는 봉우리를 향하고 동쪽으로는 절벽으로 향해 있는데 1100명이 들려 해도 꼼짝 않은데, 1명이 밀면 움직인다. 아무리 절벽 밑으로 밀어내려 해도 떨어 뜨려지지 않는다 하여 ‘靈石’ 즉 신령스런 바위라 일컫는다. 군 명칭이 이에서 비롯되었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영암’ 이름이 ‘신령스런 바위’라는 뜻의 ‘영석’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경덕왕이 지명을 한자 음으로 바꿀 때, 중국지역 명칭을 차용하거나 충북 ‘길’동군을 ‘영’동군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영암처럼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여 지명을 정한 것은 당시 영암지역의 토착적 전통을 인정한 것이었다.

결국, 월출산의 산천제의를 신라 정부가 국가 사전체계에 편입시켜 우대를 하였던 것도 이러한 정치적 의도와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월출산에서 행해졌던 국가 주관의 산악신앙 의식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월출산 국제 행해져

고려의 산천제에 관하여는 사전(祀典)의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잡사(雜祀)편에 실려 있는 산천제 관련 연대기 자료는 대략 16건 정도다. 이 가운데 현종 때 감악에 대한 보사, 서경 목멱산 신상 조성, 남해신의 사전 승격, 숙종 때 삼각산 등 개경 및 양주지역 명산대천에 대한 합제, 예종 때 개경의 송악 박연 및 서경의 목멱산 등에 대한 기우, 원종 때 무등산 제사, 충렬왕대 금성산 제사, 충렬왕대 평양 목멱산 제사 등이 전할 뿐 그 밖의 기록은 구체적 산천을 밝히지 않고 있어 사전 편성여부는 잘 알 수 없다.

고려 예종 15년에 “월생산 신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월생산은 월출산의 고려시대 이름이다. 이처럼 월생산 신사에 벼락이 쳤다고 하는 사실이 역사기록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고려시대에도 신라를 이어 국가의 사전체계에 편입되어 있는 것을 의미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 시대에도 역시 월출산에서 행해지는 제의를 국가에서 주관하였다고 하는 것은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월출산신사가 있다. ‘본 읍에서 제를 올렸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다만 ‘본 읍에서 제를 올렸다’는 표현만 있고, 남해신사처럼 별도의 사전 언급과 ‘祝香致祭’라는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지방수령이 제를 주관하는 수준으로 격이 떨어졌던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도 생각된다.

한편, 이처럼 조선 초 祀典에서 수령이 제를 지내는 곳으로 개편된 곳은 고려 때 대부분 국가 제장이었다는 견해는 참고할 만하다. 여하튼 마한시대 이래 월출산 정상에서 행해졌던 산천제가 통일신라 이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국가주관 제천행사로 자리매김하였던 대표적인 산악신앙으로 기능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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