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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대해양 신앙의 상징인
남해신사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야
■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9>영산지중해의 국제무역항, 남해포와 남해신사(下)
시종면 옥야리 남해신당, 남해신당은 지정학적인 위치나 역사적 전통에서 우리나라 최고 해양신앙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는 2001년 복원돼 2003년부터 남해신사제례보존위원회 주관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해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양 지자체 축제 시너지 효과내야

이번 주말 시종에서 마한축제가 열리는데, 나주시 또한 같은 시기에 마한축제를 여는 등 양 지자체가 행사를 별도로 치루고 있다. 지역축제를 통해 마한의 역사를 되살려보고 나아가 지역 관광산업을 일으켜 보려는 자치단체의 열정이 엿보인다. 그러나 지난 호에 본지 사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나주와 영암은 같은 영산지중해의 마한의 핵심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두 지자체가 손잡고 공동으로 행사를 추진한다면 하나의 마한을 그려내는데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년에는 이러한 필자의 바람이 꼭 이루어졌으면 한다. 여하튼 지자체들이 마한을 주제로 축제행사를 해마다 개최하는 것은, 이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였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임은 분명하다 하겠다.

앞서 남해신사가 고려시대 유일의 해신을 모시는 사전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말하자면 해신 사전의 효시인 셈이다. 고려말 기록인데, 고려시대에 사전에서 제의를 행할 때의 과정이 설명되고 있다. 즉, “본래 寺官 한 사람이 매일 번갈아 숙직하여 깨끗하게 재계하고 써서 올리면 上이 목욕재계하고 친히 압인(押印)하여 천지 종사에는 반드시 친히 제사하고 불우와 도전, 신사에는 혹 대신을 명하여 섭행케 하였다.”라는 것이다. 곧 시관이 매일 숙직하고 재계를 하고 제일에는 임금이 몸소 목욕재계하며 제사를 주관하고 있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사의 제의 전통을 복원할 때 참고할 내용이라 하겠다.
 
국가주관 해신제는 남해신사가 유일

한편, 고려 국초에는 남해신사만 별도의 사전체계에 편입되어 있을 뿐, 우리가 알고 있는 양양의 동해묘, 풍천의 서해단 등에는 별도의 사전체계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 세조 때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양성지가 “지금 있는 동해, 서해, 남해의 해신제를 주관하는 신사가 양양, 풍천, 남해에 있는데 모두 개성을 기준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재고를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곧 개성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은 동, 서, 남해에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이 고려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남해신사처럼 독립된 사전체계는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가에서 후원을 하는 해신당이 동해와 서해에  세워져 있음을 알겠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원종 때 양양에 있는 동해신사를 그 지역 지방관이 맡아 제를 지내게 했다는 고려사절요 기록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곧, 고려 후기에 들어 동해의 해신당도 관청에서 제를 주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고려 중기 문인 임춘의 ‘익령(양양)으로 가는 길에’라는 글에 “산천에 명승 많으나 풍속은 중국과 달라 (중략) 풍년이라 귀신에게 제사지내는데 진귀한 산물로 바닷고기가 풍성하구나. 얕은 물에는 찬바람 맞으며 오리가 뜨고 깊은 숲에는 석양 속에 까마귀가 운다.

妖祠(요사)에서 楚舞를 올리는데”라 하여 당시 동해신사에서 행해지는 해신제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동해신사는 주로 안전항해를 기원한 남해신사와 달리 풍어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임춘이 ‘요사’라고 하여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임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동해신사에서는 제의가 민간 차원에서 행해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별도의 사전체계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종 때 동해신사를 단순히 관에서 제를 주관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곧, 고려 중기에 부안 격포 죽막동 제의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국가 차원이 지방관이 주관하는 고을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고 생각된다.

풍천의 서해단도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동해신사와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살필 수 있다면, 비록 고려 후기에 이르러 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이 동·서해에 추가되었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인 사전체계가 수립되어 국제로 지정되어 있는 남해신사와 결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조선시대 3대 해신당의 으뜸이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기록을 찾으면 남해신사와 더불어 동해묘와 서해단이 각 방면을 대표하는 해신당으로 올라 있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남해신사와 함께 강원도 양양에 있는 동해묘, 황해도 풍천에 있는 서해단 등이 해신으로, 함경도 경원에 두만강신사, 평안도 의주에 압록강신사는 강신으로 되어 있어 남해신사 외에 동해와 서해를 주관하는 신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남해신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사전체계에 편입되어 있었다. 세종 때 “나주 남해는 중사이고 묘 위판을 ‘남해지신’이라고 쓰라, 금성산은 소사이고 묘 위판은 ‘금성산지신’이라고 쓰라. 제사는 소재관(나주 목사)이 하라”라 하였다는 기록이나,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나주목조에 “남해신사, 사전에 중사(中祀)로 삼아 봄·가을에 국왕이 향을 내려 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祀典載中祀春秋降香祝致祭)”라는 기록에서 이미 조선 초에 남해신사가 中祀에 편입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말하자면 남해신사는 고려시대에 이어 국가의 사전체계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남해신사의 역사적 비중이 수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하였음이 느껴진다. 동해신사도 남해신사처럼 중사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남해신사처럼 ‘降香祝致祭’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고, 풍천의 서해신사는 ‘降香祝致祭’라는 표현은 있지만 사전 편입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보면 사전에 편입되고 국왕으로부터 제물을 받는 신사는 3대 신사 가운데 남해신사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겠다. 따라서 남해신사는 3대 해신당 가운데 으뜸이었다고 하겠다.

양성지가 “동해신을 강릉에, 서해는 인천, 남해는 순천”으로 주장하며 3대 해신제를 주관하는 신사를 변경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이들 해신제들이 이미 민간에 뿌리를 내린 탓도 있겠지만, 특히 남해신사가 수백 년 동안 국제로서 일찍이 사전체계에 독립되어 편성되어 있을 정도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양성지가 이처럼 기존 질서를 바꾸려한 것 자체가 남해신사 등의 전통이 그만큼 공고해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 인조 23년에도 “지리산, 금성산, 남해당에 여제(厲祭)를 설행하라”고 하며 향과 축문을 보냈다고 하는데서 남해당이 여전히 조선 후기에도 국가가 주관한 대표적인 신사였음을 알게 한다. 이를 가지고 단지 남해당이 전남지역의 주요한 해신당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남해신사가 지닌 격을 지나치게 낮추어보는 것이라 하겠다.

조선후기 ‘신사’ 대신에 ‘당’이라 했다

한편 남해신사는 명칭이 ‘남해신사’, ‘남해당’, ‘남해묘’, ‘남해사’ 등 문헌에 따라 명칭이 달리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남해신사’ 대신 ‘악’, ‘해’, ‘독’으로 구분하여 ‘남해’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라 하더라도 세조 때는 ‘남해신사’, 인조 때는 ‘남해당’으로 표기되어 있어 후기에 이르면 ‘신사’ 대신 ‘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전라도 지도와 같은 조선후기의 지도나 구전 등에 ‘남해당’이라는 표기가 나오고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는 조선후기에 들어 해신 등에 제사를 지내는 국가의식이 점차 성리학자들로부터 견제를 받기 시작하면서 ‘신사’가 갖는 의미를 가급적 쓰지 않으려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한다. 따라서 ‘신사’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원래의 모습에 가깝다고 본다.
 
현대까지 이어진 남해신사의 해신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주관하는 가장 대표적인 해신제가 열렸던 남해신사의 제의는 구한말 대한제국기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한일병합 때까지 나주목사가 헌관이 되어 제를 올렸다는 사실과 1900년대 초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남해신사에 대한 언급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다, 그 당시에도 3품 이상의 관리와 주현의 수령이 제를 맡고 국왕이 직접 관여하며 식복과 수작을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국가에서 중요한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국가 주관의 가장 대표적인 행사로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던 셈이다. 이것은 남해신사가 해신에게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사당의 성격도 있었지만, 국란, 환란, 역병 등 어려움이 일어났을 때 용왕신에게 제를 올리어 그것을 극복하려는 정신적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면서 남해신사를 훼철하여 제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우리 민족의 역사성을 말살하려 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남해신사는 지정학적인 위치나 역사적 전통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해양 신앙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이러한 측면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였다. 영암군이 신사를 복원하고 제의를 재현하여 마한축제와 연결시키려 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라 하겠다.

최근 전라북도에는 부안의 죽막동 유적지를 고대 해양문화 유적지로 복원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 신사가 갖는 의미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은 마한의 심장, 영암의 역사적 위치를 부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계속>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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