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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6ㆍ25 참상, 제주도 다음 피해 커…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이뤄져야■ 8·15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영암
  •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승인 2018.10.1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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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특성 등으로 피해 많아

영암의 6.25참상은 영암의 내부적 문제가 아니었다. 6.25 한국전쟁 기간에 영암에서의 피해가 큰 원인을 일괄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주요 원인을 거론할 수 있다.

첫째는, 영암에서도 해방 후 미군정이 일제 강점기부터 항일운동 차원의 사회주의운동 계열을 불법단체로 탄압함으로써 이들이 지하나 월출산과 금정면 안산 및 국사봉 등 산속으로 들어가 이봉천 부대를 필두로 유격대를 조직하는 등 빨치산 세력이 막강하였는데, 이들은 자기들에게 비협조자 및 경찰 등 공직자들을 반동분자라 하여 잔인하게 학살하였고, 9.28 수복이후에는 군경이 공비토벌 과정에서 일반인들까지도 법 절차에 의하지 않고 학살하는 등으로 인명피해가 늘어났다.

둘째는, 영암의 지리적 특징을 들 수 있다. 영암은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서해연안에 인접해 있고, 담양 추월산에서 발원한 영산강이 목포에 이르기까지는 3백50리로 그간에 많은 지류를 이루고 있는데, 영암은 덕진강과 서호강 등이 영산강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내륙으로는 월출산(809m) 국사봉(613m) 은적산(393m) 등 높은 산들이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은 고대부터 농경문화와 해양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긍정적인 순기능도 있으나 역기능적인 면도 있다. 외적이 침입해 올 때는 강과 바다는 용이한 침투로가 될 수 있고, 영산강은 6.25한국전쟁 시기에는 인민군과 지방 좌익들의 퇴로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높고 깊은 산은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국사봉은 후기 호남 의병활동의 거점이 되었고, 6.25 한국전쟁 시기에는 영암 함평 무안 신안 장흥 강진 목포지구의 인민군 및 지방 좌익의 빨치산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국사봉을 거점으로 장흥 유치에는 ‘조선인민유격대 전라남도 유치사령부’가 1954년 4월까지 존속하면서 ‘유치빨치산’이라는 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편, 빨치산 자료집, 전남유격투쟁사, 정관호 저)

빨치산(Partisan or Partizan)이란 말은 프랑스의 파르티(Parti), 즉 도당(徒黨) 동지(同志)가 그 어원으로, 게릴라(guerriller)로 부르기도 한다. 게릴라는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에서 빨치산으로 도입하여 변형시켜 타국의 침략자에 저항하는 무장인민 투쟁으로서, 적의 후방에서 인원과 기자재를 섬멸하는 한편 통신수단과 그 밖의 것을 파괴하기 위한 독립부대라고 하기도 한다. 중공과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간의 내전을 겪으면서 모택동 쪽에서는 인민유격대(人民遊擊隊)로, 장개석 정부 측에서는 공산주의비도(共産主義匪徒)라고 불렀고, 줄여서 공비(共匪)라고 불렀다.     

셋째는, 국군의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이다.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에 의한 9.28 서울수복으로 패주하던 인민군의 주력은 혼비백산하여 태백산 일대의 산악지대로 잠입하여 북상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남지역의 공비 등 적대세력은 퇴로가 차단되어, 당시 목포지구(목포 영암 무안 함평 나주 장흥 강진 등)에는 약 2만명에 달하는 인민군 및 지방좌익들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는 500명이 무장하고 나머지는 철창 혹은 죽창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한국전쟁사 제4권, 국방부)

이들 중 목포 무안 함평 등지의 간부급들은 월출산과 국사봉 등 산악지대로 잠입하기 위해서 9.28직후 영암으로, 특히 군서 구림마을 등지로 몰려왔다. 여기에서 며칠을 머무르는 동안 큰 가마솥을 몇 개씩 걸어놓고 밥을 해먹으며 4성씨(姓氏) 문각에 분산하여 숙영하면서 대낮에도 회사정 등에서 늘비하게 누웠거나 마을을 배회하는 등 어수선하였다. 이를 알게 된 황점택이 지프차를 타고 와서 영암군당의 허가도 없이 여기로 왔느냐고 거세게 항의를 하자 그들이 슬슬 어데론가 가버렸다.(호남명촌 구림, 구림지편찬위원회)

이들은 월출산과 국사봉 일대에 둔입(遁入)하여 영암을 비롯한 장흥 함평 무안 영산포 및 나주에 출몰하여 약탈과 일반인을 끌고 갔고 게릴라전을 펼쳤다.(한국전쟁사 제4권)

최덕신의 작전명령 ‘견벽청야’

정부는 산악지대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준동(蠢動)하고 있던 공비를 토벌하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찰력과 국군을 투입하였다. 물론 국군이라 함은 육해공군을 총칭하겠으나 영암의 경우에는 경찰과 육군 및 해병대를 투입하였다.

육군의 경우, 정부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의 공비토벌을 목표로 1950년 10월 2일 경남 삼랑진에서 최덕신을 사단장으로 제11사단을 창설하였다. 작전명령은 견벽청야(堅壁淸野)로, “작전지역 내의 움직이는 것은 모두 없애버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공비는 물론 일반인까지도 공비에 준해서 사살의 대상이었다. 11사단 중 20연대(연대장 박기병 대령)는 10월 10일 광주에, 공병대대는 10월 11일 남원에 배치되어 호남지역 산악지대 공비소탕을 맡도록 했다.

영암에 투입된 육군은 1950년 10월 30일 20연대 제3대대 9중대에서 12중대까지로 대천동 부근의 노인봉 및 학리 등지를 오후 6시30분까지 무난히 탈환하였다.(한국전쟁과 함평 양민학살, 김영택 저)

해병대의 경우 영암은 목포지구 해병대의 작전지역으로, 이 부대의 작전은 한 마디로 영암지역에서 행해졌다. 목포지구 해병대는 목포 근방 일대의 공비토벌과 치안을 회복하기 위하여 진해지구 후방요원들로 구성된 백부대(대장 백남표 소령)로, 백부대는 육군 제11사단 20연대와 보조를 맞추어 산악지대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는 공비들을 섬멸하고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러나 광주에 본부를 둔 육군 20연대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후방요원들로 구성된 백부대로는 목포지구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하는데 역부족하다는 것을 파악한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작전명령을 하달, 김종기 소령이 지휘하는 제2대대로 교체하였다. 해병대 제2대대는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하여 사기가 충천한 부대로, 10월 18일 오후 6시 LST 단양호로 진해를 출발하여 다음날 오전 8시에 목포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목포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하선하였다.

당시 참가부대 및 지휘관 명단을 보면, 제2대대장 소령 김종기, 부대장 대위 김용국, 제5중대 장 중위 심포학, 제6중대장 중위 박성철, 제7중대장 중위 정광호, 제8중대장 중위 서정남 등으로, 작전기간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지속되었다.

제2 대대는 불투명한 적정을 수색하기 위하여 목포 도착 다음날인 19일에 제5중대 및 6중대에서 수색분대를 차출하여 영암 부근의 적정을 수색한 결과, 패잔병들이 해남부근에서 산악지대인 월출산과 국사봉을 연결하는 선을 따라 패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대대장은 곧 대대주력으로 하여금 월출산과 국사봉을 중점적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한국전쟁사 제4권, 국방부)

여기에 군경이 아닌 일반 청년들로 조직된 목포 유달부대(대장 박준옥)가 가세하였다. 이 토벌대는 ‘견벽청야’ 작전명에 따라 공비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작전 지역내의 공비는 물론이요 일반인들까지도 적으로 간주하고 무차별 사살하였다. 그런가 하면, 일반인을 체포하여 경찰에 넘기면 경찰이 조사과정에서 사살을 해버리고 행방불명 처리를 해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공비 등 적대세력은 국사봉이나 유치 유격대사령부에서 주로 야간을 이용하여 마을에 내려와 사람을 납치하고 물자를 확보하였는데 비협조자는 살해해버렸다. 이러한 사례들이 누적되어 영암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 가운데 큰 사례를 보면, 1950년 12월 18일 금정면 연보리 차네동 국군에 의한 170명 학살사건, 1950년 12월 11일 금정면 냉천마을 국군에 의한 127명 학살사건, 1950년 12월 25일 해병대에 의한 327명 적 사살(국제신보 보도), 1950년 7월 8일과 20일 국군과 경찰에 의한  금정면 덤재 보도연맹 200~300명 학살, 1950년 10월 17일과 1951년 1월 2일 경찰에 의한  구림주민 90명 학살, 1950년 10월 6일 학산면 은곡리 당매 인민군에 의한 13명 살해,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에 의한 영암경찰서에서 국군 정치인 가족 50여명 살해, 1950년 7월 19~20일 좌익에 의한 도포면 구학리 및 영호리 주민 60여명 피살, 1050년 10월 6일 좌익에 의한 덕진면 장선리 20여명 피살사건 등을 들 수 있다.(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 한울 아카데미, 6.25사변 피살자 명부, 정부공보처 통계국)

넷째는, 경찰서장에게 즉결 처분권을 부여함으로써 파출소나 지서소속 경찰이 부역 등 혐의자 조사과정에서 법 절차에 의하지 않고 일반인들까지 살해해버리고 행방불명 처리를 한 사례 등이 누적되어 인명피해가 더욱 커졌다. 

타 지역은 명예회복 작업 활발

우리 민족이 그리도 갈망하던 해방의 기쁨은 잠시 뿐, 한반도는 미·소의 세계 정책으로 남북이 분단되어야 했고, 이 분단은 미국과 소련의 이념대립의 장으로 나타나 6.25 한국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예고된 6.25 한국전쟁은 이 땅에서 미국과 중공의 대리전이 되어 우리의 산하(山河)는 붉은 피로 얼룩졌다.

그러나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 정권은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권과 신군부 정권으로 이어오면서 자칭하여 보수정권은 자기정권의 안보를 위해 남북분단에서 오는 위험을 정권에 이용하는 ‘안보장사’, ‘빨갱이장사’를 하여왔다. 이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간첩사건을 조작하여 국민에게 위기의식을 조장시키고 정치적 대칭관계의 인사에 대하여는 빨갱이로 몰아 제거시키는 특히, 호남인들에게 덫을 씌우는 범죄를 저질렀다.

영암의 6.25참상은 영암의 흉터요, 영암인의 고통이며 아픔이다.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8년이요, 정전된 지 65년이 되었지만 영암사람들은 그 고통과 아픔을 안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많은 세월이 지나면 잊어질 수도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러했을 것이다. 내 부모 형제가 6.25를 전후해서 적대세력이나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어도 좌익이니 빨갱이 집안이라는 소리들을 까봐 말 한마디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면서 오랜 세월 살아왔다.

여기에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와 재산을 지켜줘야 할 정부가 아무런 법적절차를 거침없이 가해주체였다는 비난을 받고 책임을 져야할 문제들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래도 제주도민은 정부와 오랜 투쟁을 하여 국회로 하여금 2000년 1월 12일 법률 제 6117호로 ‘4.3사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명예를 회복하고, 제주 4.3평화공원을 조성하였다.

거창양민 학살사건은 오래전에 특별법을 1996년 신규로 제정하여 제주에 버금가는 사업을 국비로 하였다. 이웃 함평에서도 이낙연 의원(현 국무총리)이 위와 같은 법을 발의하여 국회에 계류 중이다. 그런가하면, 나주시에서는 ‘나주세지면 동창 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조사추진위원회’를 구성, 나주시의회 의장 명으로 국회의장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영암의 경우, 군민에 비례하여 희생자 비율을 보면 제주에 버금간다. 군 차원에서 ‘진상규명과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일들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법위에 잠자는 자는 이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참여정부 시절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하여 지금도 활동 중이다. 영암인의 아픈 상처를 다시 후비자는 것이 아니요, 국민의 생명과 신체 및 재산을 보호해야 할 정부의 책임을 물으면서 영암군민들의 마음의 응어리를 풀자는 것이다. 늦었으나 이제라도 영암이 추진하여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끝>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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