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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통계연감 영암 피살자 7,175명 발표…중복·누락 등 신뢰도 낮아■ 8·15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영암
  •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승인 2018.10.0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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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에 남아있는 북한노동청사의 폐허

인명피해 조사자료 제각각

‘6.25사변 피살자명부(6.25事變被殺者名簿)’는 6.25사변으로 인한 영암 피살자 7,175명의 명단(공보처 통계국)을 등재하였다. 이 명부는 정부 공보처 통계국이 1952년 3월 31일 현재를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이 명부는 정부당국이 조사하여 등재되었기는 하나 실제로 피살된 자의 상당수가 누락되어 있고, 생존자의 명단이 등재되어 있으며, 여러 사람의 명단이 중복되어 있기도 한다.

그리고 유치지구 유격대 사령부가 1954년 4월까지 존속했고, 이후까지 은밀하게 활동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 명부 작성이후 2년간에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명단은 제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은 한국전쟁 기간에 영암의 희생자를 2,818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정부 행정안전부 산하 한시적 기구인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부산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에 용역사업으로 의뢰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관련 피해자 현황조사 용역사업 결과 보고서2007’에 의하면 한국 전쟁전후 영암지역에서 군경 및 적대세력 등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 2,818명이고, 이 중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된  인원이 1,099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위 보고서는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조사함으로써 피해자의 유족을 찾기에 어려움이 있으며, 피해자 유족이 아직도 조사 사실을 기피하는 등으로 조사에 한계가 있어 실제와는 편차가 너무 많으며, 다른 자료와도 비교하여 통계치가 많은 편차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통계연감 7,175명 인명피해

경향신문은 2010년 6월 9일자에 ‘민간인 학살규모 추정치’ 제하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한국 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엮은 한국 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실태 보고서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는 100만명(2002년)이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1996년)는 12만8,936명 △대한민국 통계연감(1952년)은 12만2,799명(1952년, 좌익에 의한 학살),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는 113만명(1960년)으로 집계하였다. 

또 4.19혁명 후 전국 피학살자 유족회가 정부에 보고한 각 시도별 민간인 학살 규모를 경기 6만명, 서울 2만명, 강원 3만명, 충북 5만명, 충남 3만명, 제주 8만명, 전북 19만명, 전남 21만명, 경북 21만명, 경남 25만명으로 보고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통계연감 창간호는 1952년 10월에 공보처 통계국에서 발행하였다. 이 연감에서 6.25로 인한 인명피해를 4285년(1952년) 3월말 현재로 납치 82,959명, 행방불명 298,175명, 부상 225,582명, 학살 122,799명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똑같은 기준 시점인 1952년 3월말을 기준으로 발간 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서는 전국 피살자를 5만9,994명으로 하여 그 명단을 작성하였고, 이 중에서 영암에서의 피살 인원을 7,175명이라 하였다.  

통계자료 들쭉날쭉 신뢰성 낮아

위의 여러 통계에서 보여준 것처럼 6.25한국전쟁 기간에 영암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는 너무나 크다. 그런데 통계자료에 따라 너무 편차가 심해 각 통계를 신뢰할 수 없다.

다만, 조사시점 등으로 보와 공보처 통계국이 1952년 3월 31기준으로 작성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상의 전국 피살자 5만9,994명 중 영암의 희생자 7,175명이 다른 자료보다는 근접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통계치도 같은 해 10월에 발간한 ‘대한민국 통계연감 창간호’에서는 전국 학살인원을 12만2,799명으로 밝히고 있어 자료에 따라 들쑥날쑥한 통계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공장파괴 등 물적 손실도 엄청나
 
인적 손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물적 손실이다. 이것에 관해 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 전체를 통해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하여 공장·도로· 교량 등이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전남 영암 같은 군에서는 방화·살인 행동이 가장 심한 곳이었는데 그들 원수들은 동군에의 관공서·학교 또는 일반 주민들의 개인사무소·여관 등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소시켰으며 이로 인해 경찰서 또는 관공서 등은 돼지 울 같은 막을 쳐놓고 그 속에서 임무수행을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라고 했다.

실제, 영암지역의 재산피해를 보면, 1949년 10월 20일 03:00경 영암군청 청사가 불에 탄 것을 비롯하여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영암군내 각 관공서 건물이 전부 소실되었다.

군내 11개 읍·면사무소와 경찰지서가 다 불타버렸으며, 영암중고등학교를 비롯해 군내 33개 초등학교 중 영보초등학교를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버렸다. 그래서 학생들은 수복 후 수년 동안 개인의 가정집이나 제각 등에서 공부를 했고, 학교 가건물이 세워진 후에는 짚으로 짠 가마니를 땅바닥에 깔고 공부를 하였다.

그런가하면, 도갑사와 교회 등 종교 건물이며 많은 민가도 불에 탔고, 도로와 교량도 잘렸고, 황천주조장 등 공장들도 불에 탔다. 구림 회사정도 1950년 10월 3일 소실되었다. 영암지역 사회는 말 그대로 폐허요, 아수라장이었다.

불안과 공포 등 정신적 공황도 심해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영암에서의 인적·물적 피해 못지않게 정신적 피해도 컸다. 부모를 잃고, 자식이 죽임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군민들에게는 불안과 공포, 대립과 분노, 갈등과 저주, 불신과 경계로 가득 찼다.

이런 상황을 당시 동아일보는 “특히 영암의 경우, 많은 인명피해로 인한 전쟁고아의 발생, 자식을 잃은 끝없는 부모의 통곡소리 등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으며,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웃과 이웃끼리도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많은 영암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 잊어지고 마음의 치유가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왔을 터다.
<다음호에 계속>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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