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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신사는 번성했던 남해포구의 모습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7>영산지중해의 국제무역항, 남해포와 남해신사(上)
지도는 삼국시대 이전 영산지중해의 주요 포구.

영산지중해 대표, 국제항구 옥야리에

주지하다시피, 49개 군(群), 187기에 달하는 옹관묘가 분포되어 있는 영암군은 ‘옹관묘의 고장’이라 일컬을 만하다. 특히 삼포천 수계에 속한 내동리·신연리·옥야리를 중심으로 25개 群, 100여 기의 옹관묘가 모여 있는 시종 지역은, 고분 규모나 숫자를 통해 4∼5세기에 마한 대국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중에서도 옥야리 지역에는, 장동 마을에 있는 분구 규모 30m가 넘는 봉분을 이루고 있는 방대형 고분 등 상촌 19기, 신산 5기, 서촌 1기, 장동 3기 등 여러 마을에 총 28기의 대형고분이 분포되어 있어 연맹체의 심장부였음을 상상하게 한다.

이 지역은 가야, 왜, 백제, 심지어 신라와도 활발히 교역이 이루어졌던 영산지중해의 교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는 옥야리 방대형분에서 출토된 영산강 토기의 전형인 유공광구소호가 왜의 스에키 계통과 연관이 있고, 통형 고배가 아라가야가 위치한 함안지역 고배와 관련이 깊고 장경호와 세승문 단경호 또한 가야계통으로 살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제교역이 활발히 이뤄졌던 영산지중해

이와 같이 옥야리 일대가 고대 마한왕국 시절 영산지중해의 교역 중심지였다면, 그에 걸맞는 항구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옥야리 방대형 고분과 불과 1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삼포천 하류에 있는 ‘남해포’라 불리는 유명한 포구가 눈길을 끈다. 동력 없이 항해를 하던 때에는 계절풍 등 바람과 해류에 의지하게 된다.

한반도 서해는 해류가 미약한 대신 조류가 발달하였고, 남해에서는 외해에서 해류가, 해안 부근에서는 조류가 강하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대방에서 왜에 이르는 항로가 (낙랑·대방)군→서해안→韓國→남해안→狗耶韓國(가야)→對馬島→왜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낙랑과 대방이 변한에서 철을 수입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서남해의 연안 항로가 주요한 교역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안 항해에는 조류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남해안은 섬들이 많아  암초와 수심이 깊지 않은 곳이 많고, 빠르고 지역적 편차가 심한 조류 흐름으로 외지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항로였다. 게다가 노를 젓는 운항법으로는 일본열도나 가야지역에서 낙랑 지역까지 연안 항해를 하는 데 필요한 물자 보급과 노를 젓는 선원들의 휴식 문제로 인한 중간 기항(寄港)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거기다 역조류를 만나면 가까운 포구에 들어가 6시간 후의 순류를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장거리 항해를 위해서는 항로를 안내해주는 현지인의 도움과 항구에 정박하는 것을 허락해주는 현지 세력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겠다.  서남해 연안 항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영산지중해의 마한 세력이 중개무역을 통해 세력을 형성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남해포구. 남해신사가 있는 남해포는 영산강 하류의 가장 대표적인 항구로 추정되나 지금은 농경지로 변모했다.

남해포는 국제항의 최적 조건 갖춰

고금을 막론하고 기항하기에 적합한 항구는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만(灣)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작은 목선으로 항해를 하던 고대에 있어 바다와 강이 만나는 후미진 곳에 위치한 항구는 파도로부터 보호받고, 바닥이 모래나 개흙으로 부드러워 선저가 부서질 우려도 적으며, 潮汐을 잘 이용해 들고날 수 있어 항구로써 최적이었다.

이러한 조건을 가장 잘 갖춘 곳이 남해포였다.
남해포는 영산강종합개발 사업과 영산강하구둑이 건설되기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목포에서 이곳을 종점으로 하여 여객선이 다녔고, 둑 건설 후에도 내수면 어업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할 정도로 현대에 이르러서도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결빙이 안 되고, 상·하류 강바닥의 높낮이 차이가 크지 않아 유속이 느리며 조수의 영향을 받아 뱃길로서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영산강의 하류는, 썰물 시 갯벌과 갯고랑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서해안 바다로 ‘남해만’이라 칭하던 내만(內灣)이 형성되어 그곳을 중심으로 많은 항, 포구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영산강 중류는 조수가 영향을 미쳤던 구간으로 江上 포구가 존재하였다.

조수에 따른 感潮 상·하한은 나주대교 기준 상하 5㎞, 즉 만봉천 합류 지점-원가 마을에 이른다. 다시들 일대의 중심 항구였던 회진까지도 대형 선박(海船)들이 다니는 뱃길이 열려 있었다. 문헌기록으로 보면 海船들이 영산창 일대까지 올라온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영산강 뱃길에는 고대 마한 시대부터 많은 포구들이 있었을 것이나, 고려 이전의 이름들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다만 고분, 산성, 유물산포지 등 유적으로 추정한 중심지와 간척 상황, 해발 고도, 옛 지명, 촌로들의 증언 등을 통한 뱃길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 추정은 가능하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영산강 뱃길 중에서 많은 포구들이 위치하였던 곳이 하류, 그 중에서도 현재의 삼포강 중·하류에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지역이 고대 마한 당시, 교역의 중심지였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하겠다. 그 중에서 옥야리 남해신사가 있는 곳에 자리한 남해포구가 가장 대표적인 항구였을 것이다. 영산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구림 앞바다의 수심이 10m에 달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남해포 또한 이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남해포가 항구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남해신사, 번성했던 남해포구 재확인

20여 년 전 목포대 박물관이 이곳 ‘남해신사’ 터를 발굴했을 때 확인된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지금도 논밭 여기저기서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생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영산강과 삼포천을 사이에 두고 비옥한 충적 평야가 형성된 이곳은, 가장 빨리 도작이 시작된 다시들 가흥리, 엄청난 벼껍질 압착층이 확인되고 있는 광주 신창동 유적과 더불어 영산강유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따라서 옥야리 일대의 마한 대국이 거점 항구인 남해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개무역에다 배후의 풍부한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영산지중해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모습을 옥야리 방대형 고분이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남해포가 영산강 하류의 가장 대표적인 항구였다고 하는 사실은,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위치와 더불어 그곳에 해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남해포에 있는 신사는 강원도 양양에 있는 동해묘, 황해도 풍천에 있는 서해단과 함께 3대 신사에 속한다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다. 대외무역이나 원거리 항해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항해는 예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작은 선박으로 해류와 바람에 의지하여 항해를 하는 고대인들에게 있어 불안감을 해소하고 무사 항해를 간절히 기원하였을 것이다. 바로 해신을 모시는 공간이 일찍부터 있었을 것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신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 지역이 항구로써 지니는 역사적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남해포에 해신을 모시는 사당의 존재는 고려시대부터 확인되고 있으나 전북 부안의 죽막동 유적을 통해서 그리고 옥야리 일대에 전승되고 있는 당제를 통해서 고려시대보다 훨씬 이전 어쩌면 마한시대에 이미 그곳에서 해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다음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계속>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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