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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잃은 고아 수천 명, 자식 잃은 부모 넋 잃고 길거리서 통곡■ 8·15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영암
<5>한국전쟁이 몰고 온 영암의 상처
  •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승인 2018.09.2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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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유치지구 유격대사령부 종합전과 발표

장흥 유치지구 유격대 사령부는 1950년 9월 28일부터 1951년 6월 10일까지의 유격활동을 전과(戰果)라 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작전회수: 987회 △동원된 유격대원 연인원 수 : 20,898명, 비무장대 : 29,158명  △생산유격대 : 58,001명, 투쟁인원 : 122,578명 △전과 : 군경 등 사살: 2,412명  부상: 639명, 포로: 224명 △노획 : 기관총 1정, 소총 40정, 기관총탄 : 110발, 소총탄 : 2,300발 △지서 등 거점파괴 : 66건, 철도 파괴 : 66건, 도로파괴 : 2,922건 △전주절단 : 17,505건,  군중 정치공작 참가 연인원 : 50,123명으로 발표하였다.

위 활동 중에는 “영암 멸공대를 응징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1951년 6월 3일 영암유격대는 영암읍 부근에 주재하고 있는 멸공대와 한청본부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군경의 앞잡이로 무고한 양민을 괴롭혀 원성을 사고 있는 터였다. 진입한 대원들은 멸공대원 6명과 한청 간부 6명을 응징하였다.

또 영암출신 박춘근은 가명이 박대화로 전남대학교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합법(合法,미군정초기 인공을 인정하던 시기) 때부터 인민위원회 보건부장, 후퇴 후에는 총사 의무과장으로 활동 중 두 팔을 적탄에 잃고도 의무에 헌신하여 영웅 칭호에 빛났으며, 전남부대 부정치지도원, 1954년 2월 백운산에서 생포되어 중형을 받았다. 

‘전남 유격투쟁사’를 저술한 정관호는 1925년 함경북도 북청에서 출생, 평양 노어대학을 졸업하고 원산 교원대학 교원으로 재직 중에 1950년 7월 6.25전쟁 때 전남 강진으로 파견, 1950년 말 춘천으로 집결지시를 받고 이동 중 혼자 남게되어 장흥군 유치산에 입산하여 강진군당에 합류,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에 소환되어 ‘전남노동신문’ 주필을 역임하였다. 1954년 4월 8일 백운산에서 검거되어 형을 살았다. 장편소설로 ‘남도 빨치산’ 전6권 외에 여러 권의 시집이 있다.

6.25 한국전쟁으로 영암에서 발생한 참상을 당시의 언론 및 정부기록 등 문헌을 중심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인명손실-동아일보 12,044명 보도 

영암군의 인구는 1949년 말 기준으로 115,994명이며, 이듬해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 기간에 발생한 영암의 인명피해는 자료에 따라 기산일이 다르며 편차가 심하여 통계수치를 신뢰하기 어려우나 피해가 큰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동아일보는 영암에서 발생한 인명피해를 12,044명이라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는 김준철 기자를 전라남도 지역에 특파하여 1950년 11월30일까지 취재한 후, 1950년 12월 22일부터 23일 양일에 ‘전남지구 민정순찰기’라는 제하로, 9.28수복 이후의 ‘전남지구 치안현황, 피해상황, 입산공비의 동태, 제2 국민병 소집실황, 사회단체 동향’을 부제로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서 1950년 11월 30일 현재, 6.25로 인한 인명피해는 전라남도가 74,814명으로, 영광이 21,040 명이요, 영암이 12,044명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영암에서 희생된 숫자는 필자가 여러 자료를 검토 분석한 결과 너무 과장되었거나 희생범위(학살·부상·납북·재산피해 등)를 밝히지 않아 그 숫자가 모호한 감이 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전남도내 입산공비 수는 약 2만명으로 추산되며, 전남방직 및 화순탄광 등의 전소로 재산피해 총액을 1천억 정도로 추산했다.

동아일보 1950년 12월 22일자 기사를 그대로 전재(轉載)한다.

당지구의 치안상태는 아직도 입산공비들의 위협을 받고, 적지 않은 불안 가운데 놓여 있다. 시·읍은 물론 각 군의 군청소재지는 치안의 안전한 확보를 기하고 있으나 경찰서 또는 경찰지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촌락에는 아직도 공비들과 그들 추수자들이 횡행하여 공공연한 행동을 감행하고 있다. 즉 당지구의 경찰지서 배치는 지난 10일경 현재로 도내의 8활 5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무장경관의 인적부족으로 각지서 관내의 전 촌락을 보호하기에는 매우 곤란한 현상이었다.

소위, 입산공비라고 부르고 있는 그들은 대게가 지방유격대 또는 악질분자들로 그중에는 북 괴뢰군 패잔병들이 약간 가담되어 있다. 이들은 산 밑에 있는 촌락 등을 이용해서 월동준비를 부지런히 준비 중에 있는데 촌민들은 어찌할 수 없이 그들의 요구대로 식량·의류 등의 물자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지방민들은 이들 공비들을  최소한 기일 내에 완전히 소탕 숙청하는 데는 무엇 보담도 지방청년 또는 청방군의 무장을 시급히 해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현재 어느 지방을 보던지 구사일생으로 도피해서 살아나도 이들 청년들은 공비들의 야수적 위협을 받아가면서도 자기향토를 재건하는데 결사적으로 투쟁하고 있으며, 주야를 통해서 경찰의 보조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유일한 요청은 중앙당국에서 하루속히 무장을 시켜 주며는 조국애와 향토애에 불타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이들 민족의 원수를 무찌르는데 자신의 충분한 역할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도 관내에서 진도 해남 고흥 여천 등지를 제외한 기타지구는 아직도 안전한 치안확보를 기하지 못한 관계로 도의 말단행정이 약 4할 가량이나 시달되지 못하고 있다. 피해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번 전란으로 인하여 당 도내에 있는 피해총액은 11월 30일 현재로 놀랠 만치 일 천억에 달하고 있다. 전기 피해 중 광주의 전남방직과 화순탄광의 전소로 피 손해액의 약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기타는 각 지방에서 괴뢰군의 후퇴 당시 최후의 발악으로 각 관공서 학교 기타 큰 건물 등을 방화코 도주하기 때문에 입은 피해액이다. 적색분자들의 방화로 전소당한 관공서건물은 1,831동에 달하고 있으며 학교 건물의 전소 및 손상이 529동, 그리고 일반주택이 29,269동이 소각 또는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었다.

전남 영암 같은 군에서는 가장 방화·살인 행동이 심한 곳이었는데 그들 원수들은 동군에의 관공서 학교 또는 일반주민들의 개인사무소 여관 등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소시켰으며 이로 인해 경찰서 또는 관공서 등은 돼지 울 같은 막을 쳐놓고 그 속에서 임무수행을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인명피해에 있어서는 사망자수가 총 74,814명이고, 부상자 총수가 37,050명인데 그 중 일반민이 사망 7만3천5백여명, 공무원이 사망 1,306명, 부상 1,021명이다.

그런데 이들 양민의 피해는 영광이 21,040명, 영암이 12,044명으로 사망률이 가장 심하며, 그 반면에 여수가 80명, 순천이 63명으로 여수사건의 쓰라림을 맛본 영향인지 가장 평온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영광 영암 장성 무안 장흥 등지를 가보면 어버이를 잃은 고아들이 수천 명에 달하고 있으며 또 자식을 모조리 피살당한 부모들이 넋을 잃고 매일같이 앉아 통곡하고 있는 양은 참아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동아일보 1950, 12, 22)

동아일보가 보도한 이 기사는 당시 전남지역의 참혹했던 실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영암의 경우, 많은 인명피해로 인한 전쟁고아의 발생, 자식을 잃은 끝없는 부모의 통곡소리 등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으며, 각종 관공서 건물 방화와 도로 및 산업시설의 파괴 등으로 재산적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음을 보도했다. 

다만, 이 기사는 1년 4개월 늦게 공보처 통계국이 1952년 3월 31일 기준으로 작성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서 밝힌 7,175명보다 약 5,000명 정도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그 신뢰성이 낮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희생자 숫자는 그 집계 방법과 출처 및 희생의 범주 등을 제시하지 않았고, 1950년 11월 30일 이후 국사봉을 중심으로 한 유치지구 유격사령부가 전멸된 것은 1954년 4월까지로, 그 기간의 희생자 등을 합산하면 그 피해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예로 국제신보를 보면, 1950년 12월 25일자에서 ‘적 사살 327명’이라는 제하에 ‘영암지구 아 해병대 전과 다대’라는 부제로, 그 기사내용은, “금 23일 목포에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아 해병대 모 부대는 거반 15일부터 1주일 동안 영암지구 월출산, 국사봉 ‘잔비 소탕’에 출동하여 이와 맹렬한 교전 끝에 다음과 같은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적 사살 327명, 노획물 다수 -아방피해 전사3명, 부상1명”이라고 보도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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