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6>마한의 국제 무역항 상대포와 매향비(埋香碑)

영산지중해에 위치한 상대포. 구림 상대포는 매향의식의 존재를 알려주는 매향비가 인근에서 발견되고 있어 과거에 해안지역이었고 국제무역항이었음을 확실하게 입증해주고 있다.

항·포구가 발달한 영산지중해 중심지, 영암

마한의 심장이었던 영산지중해의 관문에 위치한 영암지역에 있는 크고 작은 항구들을 중심으로 대외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제방건설로 지금은 대부분 항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영암군의 11개 읍·면 모두에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영암에는 현재 행정 구역 명칭인 도포면·서호면을 비롯하여 남아 있는 지명을 통해 포구가 24개, 나루터 23개 등 모두 47개의 배가 드나드는 항구들이 있었다.

심지어 가장 내륙에 속하고 제법 지대가 높은 금정면에도 포구와 나루터가 각 하나씩 있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포구와 나루터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군서면과 삼호읍 지역이다. 왕인박사유적지가 위치한 군서면에는 2개의 포구와 9개의 나루터가, 삼호읍에는 8개의 포구와 2개의 나루터가 있었고, 포구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삼호읍, 시종면, 서호면의 순이다.

이들 포구 가운데 상대포가 마한 당시에 가장 큰 항구로써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누차 살핀 바 있다.(본지 2017. 9. 25일자) 상대포는 왕인박사 일행이 도일하였다는 전승이 남아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항구다.

며칠 전에도 필자가 영암 배날리를 지나오면서 배가 드나든다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마한시대에는 큰 포구가 형성되어 있었고 지금 지나는 길도 당시에는 영산지중해에 속한 바다였다고 설명을 하였으니 일행들이 크게 감탄해마지 않았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상대포 일대는 오늘날 매립되어 이곳이 과연 마한의 국제항이었을까 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회의를 품은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택리지에 등장한 상대포

 

상대포 인근 서구림리에서 발견된 정원(貞元) 매향비.

상대포가 속해 있는 구림마을이 고대에 주요한 포구였다고 하는 것은 이미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구림촌은)신라 때 이름난 마을로써 지역이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하여 신라에서 당나라로 조공갈 때 모두 이 고을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 바닷길을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紅衣島)이 이른다.

다시 하루를 가면 가가도(可佳島)에 이르며, 艮方 바람(동북풍)을 만나 3일이면 台州 寧波府 定海縣에 도착하게 되는데, 실제로 순풍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에 도착할 수도 있다. 南宋이 高麗와 통행할 때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 만에 고려 경계에 이르고 뭍에 올랐다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라고 하는데서 이 지역에 이미 국제적인 항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지도에 확인된 수심 깊은 상대포

1872년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전라도 지도’의 ‘영암군 지도’에는 구림과 함께 서쪽 물길의 수심이 3장(丈)으로 표기되어 있고, 1899년 제작된 ‘구한말 지형도’에도 구림 서편이 바다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구림 앞에는 깊이 3丈, 즉 수심이 10m 정도가 되어 큰 배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바다가 펼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헌이나 전승에 남아 있는 ‘상대포’ 항구가 바로 그곳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상대포’는 한국지명총람에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배척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백제 때부터 중국, 일본 등지와 해상교통의 요지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대포와 하대포는 상대포 아래쪽 마을이며, 배척골은 남송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까지 배가 닿았으며, 돌정재는 배척골 북쪽에 있는 고개로 백제 때 학자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이곳에서 고향인 구림을 돌아보곤 하였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상대포를 중심으로 이웃한 항구들이 여럿이 있음은 분명하다.
 
철마신앙과 매향비로도 확인

이곳이 큰 항구였다고 하는 것은 인근 월출산 제사유적 터에서 신라때 것으로 보이는 철제마 유물의 출토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제사유적은 바닷가에 세워져 안전항해를 기원했던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처럼, 월출산에서 상대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제사터를 마련하여 안전 항해와 풍요를 기원하는 ‘철마신앙’의 형태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곳 인근에 있는 매향비들이 주목되고 있다.

매향은 미륵불의 용화회에 공양할 침향을 마련하기 위하여 향나무를 비롯해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을 바닷가 갯벌에 묻는 의례이며, 침향을 매개로 장래에 하생할 미륵불을 만나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 행위이다. 주로 내륙 산지에서 내려오는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해안가의 내만(內灣), 첨입부(添入部)가 매향의 최적지로, 연해지역 특히 한반도 서남해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행사를 치른 후 매향의 시기와 장소, 매향을 주도한 세력 등을 비석이나 바위 등에 새겨 기록으로 남겨 놓은데 이를 매향비라고 한다. 현재 발견된 대부분의 매향비를 통해서 매향의식이 고려 전기에도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고려 후기인 충열왕 대부터 조선 초 태종대에 걸쳐 해안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 말, 조선 초에 해안지역에서 이러한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 당시 빈번한 왜구의 침략을 타개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견, 매향을 갯벌에 묻기 위해서는 바닷물과 산곡수가 만나는 해안에서 행해지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왜구의 침범과 관련짓기는 지나친 억측이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미륵신앙을 통해 내세의 복을 비는 사람들이 결합한 결사활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매향 활동이 바닷물과 산곡수가 만나는 갯벌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매향의식의 존재를 알려주는 매향비가 상대포 인근에서 발견되고 있어 이곳이 과거에 갯벌, 곧 해안지역이었다는 것을 더욱 입증해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엄길리 매향비이다.

서호면사무소 인근 해발 120m의 철암산에 촌로들이 ‘쇠바위’, ‘글자바우’라고 부르는 바위에 매향 사실이 암각되어 있다. 고려후기 충목왕 때인 1344년 미타계원들이 미륵에게 향을 바치는 의식을 하고 기록한 내용으로, 매향 사실을 일반 비석이 아닌 자연석에 암각 형태로 기록한 점이 특징이다. 이 매향비는 이처럼 일반 비와 형태도 다르고, 비교적 판독이 가능한 형태의 글자가 114자나 되는 등 역사적 가치가 있어 국가 보물 130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구림 매향비 기존 학설 뒤집어

그런데 엄길리 암각 매향비가 있는 곳의 맞은 편 군서면 서구림리 해안, 일명 비석거리라고 하는 곳에서 매향비가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땅속에 묻혀 있다가 도로확장 과정에서 발견된 것인데, 비석의 재원은 높이 132cm, 폭 26cm, 두께 26~30cm 정도이고, 화강암 자연석에 다른 매향비와 마찬가지로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비석이 처음 발견된 곳이 비석거리라고 불리었다고 하는 것은 이 비석의 존재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알려져 있고,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4행 42~4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이 비석은, 판독결과 ‘정원(貞元) 2년 병인’이라는 간지가 확인되어 통일신라 원성왕 2년(786)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판독글자 가운데 ‘행향(行香)’이라는 문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매향의식을 기록한 매향비임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매향비로 알려진 신안 팔금도에서 발견된 매향비가 통화 20년 즉 목종 5년(1002)의 것과 비교해보더라도 거의 2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보인다.(# 팔금도 매향비의 건립연대를 소개한 학자가 1002년을 거란 통화 10년, 의종 2년이라 서술한 이후 모든 연구자들이 아무런 확인 작업 없이 그대로 인용하는 우를 범하였다. 이 기회를 통해  사실을 바로 잡는다)

이렇게 보면 서구림리에서 출토된 매향비는, 이 지역이 과거 갯벌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줌으로써 상대포라는 문헌에 전승되는 항구의 존재를 명백히 해줌과 동시에 이미 8세기말 에 매향의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매향의식이 고려시대에 등장하였다는 기존의 학설을 수정하게 하는 결정적 증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이 지역에서 이와 같이 불교 결사가 나오게 된 배경을 찾아야 할 새로운 과제가 생긴 셈이다.
 
영산강하구언 터 영산지중해의 물길 살려야

이처럼 국제무역항으로 마한 지중해의 관문구실을 한 상대포 일대는, 1540년 경 당시 재지 사족들이 지남제라는 방조제를 쌓아 현재의 구림 12마을의 토대가 되는 지남들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점차 항구의 기능이 약화되다, 1939년부터 1944년까지 현준호 등이 1.2km에 달하는 방조제를 쌓아 학파농장을 만들면서 상대포는 사실상 항구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부터 1998년까지 추진된 영산강4단계 정비사업 때 이루어진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상대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영산지중해의 찬란한 영화(榮華)는 이제 머나먼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필자가 기회 닿는대로 이야기하거니와 영산강하구언을 터서 영산지중해의 옛 물길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마한의 심장, 영암’의 영광을 찾는 지름길임을 재삼 강조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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