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5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영암
<5>한국전쟁이 몰고 온 영암의 상처

반민특위 조사위원 김준연

미군정이 약 3년 만에 끝나고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다.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 헌법체제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유엔은 남한의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결의를 했다. 반면 북한은 1945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승만의 신생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선결문제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요,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족 행위자 처벌로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국회는 1948년 9월 29일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여 이에 근거하여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1949년 9월까지 활동할 수 있는 한시적 기구를 설치했다. 이때, 영암출신 낭산 김준연은 전남지역 조사위원이었고, 현준호는 김준연의 권고에 따라 자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밀명(密命)으로 경찰이 1949년 6월 6일 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이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을 한 사람도 처단하지 못하였다. 이는 이승만 스스로가 자신의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이요, 친일 세력들이 반공집단으로 변신하는 계기를 제공한 꼴이었다.

또 이승만의 무력에 의한 북진 통일론은 자신의 정치적 약세를 감추기 위한 술수였으며 김일성의 남침 빌미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6.25한국전쟁은 3년 이상 지속되면서 이 좁은 땅에 150만 명의 외국 군대가 와 있었고, 남북 총 400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남한에서 해방 직후의 주도적 정치세력은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인사들이었으나 미군정에 의하여 점차 좌익으로 규정되었고, 이들 중 다수는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지하 및 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했다.

영암에서도 1947년 10월 이후 월출산을 근거지로 유격대가 형성되었고, 1948년 7월에는 영암군당위원장 이봉천 부대가 조직되어 6.25 한국전쟁 전후로 월출산과 금정면 안산 및 지리산 등지에서 빨치산활동을 계속하였다. 이에 대처하여 군경의 공비 토벌작전이 빈발하였다.
빨치산이란, 일반적으로 한 지역의 주민들이 그 지역의 정부에 반대하여 벌이는 투쟁을 의미 한다(박태균의 한국전쟁)

1949년 10월 30일 새벽 4시쯤 영암경찰서 앞 고지에서 공비(14연대 소속) 수십 명이 M1소총으로 경찰서를 향해 집중 사격하므로 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경찰서장 이경, 보안주임 김동진, 내근직원 전원은 포대에 배치되어 자체 경비를 하고 기동대 1소대는 동무리 방향, 2소대는 남풍리 방향을 맡아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다음날 공비는 대신리 방면으로 하여 금정면 안산 쪽으로 도주하였으나 경찰은 계속 추격하여 금정 더부내골에 거점을 두고 활약하던 공비 영암군당을 소탕하였다. 이때 민간인 여러 명이 희생되었고, 공비들의 99식 등 다수의 총과 의류 등을 노획하였다. 이후 영암관내의 치안상태는 6.25전쟁 이전까지 안정을 찾은 듯 했다.
 
이봉천 부대의 빨치산 활동

이봉천은 영암읍 회문리 2구 출신으로 공산당 영암군당 위원장으로 도갑사 상견암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중 1948년 6월 20일 저녁 12시쯤 일제 38식과 99식 소총 등 10여정으로 무장하고 비무장대원 30여명과 함께 회문리1구에 출몰하여 김상태, 조자환을 죽창과 칼 등으로 학살하고 가옥방화, 의류와 식량 등을 약탈하여 월출산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영암경찰서장 이경은 경찰 30여명을 지휘하며 도갑사 상견암에서 작전을 개시, 공비들이 후퇴하여 오후 3시쯤 상견암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순경 1명이 전사하고 공비 여러 명이 사살되었으며 이봉천은 총상을 입고 영암읍 회문리 1구 김현재의 집 2층에서 치료를 받고 완치,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남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9.28수복 후에는 지리산, 광양 백운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후 영암군당 위원장으로 금정면 안산에서 활동하던 중 1951년 10월 어느 날, 저녁 10시쯤  칼빈 1정을 소지하고 영암읍 송평리 송계마을에 혼자 나타나 주민들이 신고하였으나 덕진 방면으로 도주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영암군지 상권 참조)   

6.25 한국전쟁 당시 영암의 경우 1950년 7월 23일에 군수를 비롯한 우익진영 인사 70여명은 해창에서 영암호를 타고 목포 쪽으로 피난 가고, 영암경찰서 경찰은 서장 김진현 경감의 지휘로 완도를 경유하여 청산도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여천군 남면도로 이동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암경찰은 후퇴직전 영암지역 보도연맹들을 처단하였다. 

다음 날인 7월 24일경에 인민군이 영암에 진주하여 군당인민위원회와 분주소 등을 설치하여 군 인민위원장은 최규동이, 내무서장은 최병수가, 군당위원장은 황점택이 맡았다.

황점택은 일명 황병택으로 영암읍 용흥리에서 태어나 합법 때 영암군당위원장을 맡았고 후퇴 후에는 유치지구 유격대장, 총사 책임지도원, 그 뒤 지하로 내려가 당 재건 공작을 하다가 비트가 발각되어 중상을 입고 이송 중 금정에서 영암으로 향하는 고개 여운제에서 절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정관호의 전남유격투쟁사)

최규동은 1932년 영암농민 시위와 관련하여 목포지원에서 벌금30원을, 최병수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인민군 점령기에 영암군 인민위원장 최규동과 내무서장 최병수는 경찰 수복으로 금정면 일대의 산으로 입산하였다가 1951년 봄에 하산하였다. 이후 최병수는 1956년 제2대 덕진면 면의원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영암군지 상권, 마을로 간 한국전쟁 박찬승, 6.25영암군 민간인희생사건 등 참조)

인민군 점령기에 군서면 구림 등에서는 좌익들에 의해 우익인사 일가족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군경의 1950년 9월 28일 수복이 시작되면서 경찰의 보복이 있었다. 이러한 악순환이 진행되면서 인명학살 및 공공건물 방화 등으로 그 참상은 말할 수 없었다.

철수했던 영암경찰의 선발대가 영암에 첫 진주한 것은 10월 6일 새벽에 강진에서 풀치제를 넘어 영암읍 개신리를 시작으로 용흥리 일대에서 수색, 주민에 대한 검거 및 피살 등이 시작되었다. 이날부터 영암경찰서를 수복하기 시작하여 10월 16일에는 삼호면이, 10월 31일에는 도포면이, 11월 14일에는 학산면이, 11월15일에는 덕진면이, 12월 15일에는 군서면이, 12월24일에는 미암면이 각각 수복되었으며, 최종적으로 금정면 지서를 수복한 것은 다음해 4월이었다.

영암에 주둔하던 인민군은 북한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지방 좌익들은 월출산과 국사봉 등으로 입산한 후 주로 장흥유치 유격대 사령부에 소속되어 유격대(빨치산)로 활동, 군경과 교전 등으로 양민의 희생 및 학교 교사, 관공서를 방화하여 인적·물적 피해는 물론 이웃끼리도 눈치를 살피며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영암 대부분의 마을 분위기가 불신과 공포로 팽배하였다. 군내 전체적 분위기도 그러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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