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5>영산강유역의 옹관묘와 나주 오량동 요지

나주 오량동 도요지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묘제인 대형옹관의 실체를 밝혀줄 옹관 가마터가 2001년 나주 오량리에서 발견되었다.

옹관묘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던 매장방식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옹관묘는 신석기시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진주 상촌리 유적에서 주거지 내부에 단옹을 세워 매장하는 방식이 확인되었다.

영산강유역의 첫 옹관 출토는 1963년 신창동 유적에서였다. BC1세기에서 AD1세기 무렵으로 편년된 이 옹관은 납작한 바닥에 동체의 중하부가 볼록하고 외반구연인 재지 계통의 송국리형 토기와 삼각형 점토대 토기의 양쪽에 쇠뿔 모양 손잡이가 달린 고조선 계통의 명사리식 토기가 결합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 '신창동식 옹관'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이 지역의 독자적 특성을 지닌 토기였다. 이 옹관이 전용 옹관이 아닌 실생활에서 사용된 점토대토기를 이용하고 있어 본격적인 옹관의 이행기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서 필자는 매장된 시체를 발굴하고 뼈를 씻어 다시 장례를 치러 뼈를 매장하는 것이 전형적인 복장의 형태가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세골장이나 초분, 심지어 지석묘나 옹관묘로 나타났다고 살핀바 있다.

전남지역에서 영산강유역 일대를 중심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발전된 다수의 옹관묘가 확인되고 있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기존의 일상용 토기를 옹관으로 사용하는 방식에서 점차 발전하여 기원후 3세기를 넘어서면 분구를 가진 옹관묘가 등장하고 성인 시신을 넣을 정도의 크기인 전용 대형옹관을 사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전용 대형옹관은 기형에 따라 경부가 형성되고 외반되는 ‘>형’과 경부의 꺾임 없이 동체에서 구연이 매끄럽게 올라가는 ‘U형’으로 구분되고 있다.
 
옹관묘의 핵심지역, 영산강유역


지금까지 확인된 전남지역의 옹관묘는 100여 곳에 이른다. 특히 영산강유역 중하류인 나주, 영암지역을 중심으로 대형옹관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2008년 이후에 전라남도 지역에서 신규로 보고된 된 39개소 유적만 보더라도 영산강 중하류 유적이 21개소로 남해안지역 2개소, 서해안지역 8개소, 영산강 상류 4개소, 전남 동부지역 4개소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것을 보면, 이 지역이 옹관묘의 중심 분포권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전용 옹관은 북쪽으로는 장성, 서쪽으로는 신안, 남쪽으로는 해남, 동쪽으로는 화순 지역까지 분포하고 있어, 영산강유역 옹관문화의 영향력이 미쳤던 범위를 상정해볼 수 있다.

이러한 전용 옹관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의 하나가 시종 옥야리 방대형 고분이다. 분구 중앙에 석실묘, 가장자리에 석곽묘 1기, 옹관묘 4기, 목관묘 1기가 확인되었던 이 고분의 석실분이 영산강유역에 새롭게 등장한 묘제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찍이 주목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4기의 옹관 또한 전형적인 영산강유역의 전용 옹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하겠다.

말하자면 1호·3호·4호는 합구식, 2호는 단옹식 옹관묘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부는 약하게 형성되었고, 구연부는 완만하게 벌어져 올라가 있어 U자형 전용옹관 중에서 가장 성행하고 발전된 형태를 띠고 있다. 나주 다시들의 복암리 3호분 고분에서도 무려 3m가 넘는 대형옹관들이 26기나 대량 출토되고 있는 것 또한 영산강유역에서 옹관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입증해주는 증좌이다.

영산강유역에 널리 사용된 대형 전용옹관이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현재 짐작하게 하는 유구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그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초기 옹관과 동일한 대옹을 제작한 곳으로 나주 도민동과 운곡동 유적 가마터가 주목되고 있다.

이 가마터 인근에 완도촌 고분 1호분, 도민동 2호 고분과 같이 옹관 소비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웃한 도민동 가마터에서 자급자족하지 않았을까 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그곳에서는 토기 파편만 나올 뿐 옹관 파편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옹관 가마터라고 확언할 수 없다.
 
대형 전용옹관의 공급기지, 오량동 가마


이러한 과정에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독특한 묘제인 대형옹관의 실체를 밝혀줄 생산시설인 옹관가마터가 나주 오량리에서 2001년 우연히 발견되어 사적 4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적지가 있는 곳은 나주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영산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오량동 산 27번지 일대로 가야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20m 내외의 낮은 3개의 구릉 끝자락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영산강 건너 1.5km 지점에 다시면 복암리 고분군이 있고, 남으로는 6km 지점에 시종, 반남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대형 옹관고분과 토기 가마가 조사된 나주 운곡동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량동 유적은 영산강 중하류지역 옹관고분 축조집단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된 오량리 유적은 전체 면적이 약 26만5천594㎡ 정도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요지이다. 현재까지 가마 77여기, 공방지 2기, 가마관련 유구 7기, 폐기장 2기, 작업장 1기 등의 생산유구와 가마폐기 이후에 조성된 매장유구 15기가 확인되었다. 가마는 구릉 경사면의 등고선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축조되었으며 일정 간격을 두고 나란히 배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가마부의 규모는 길이 592~828㎝, 최대 너비 136~190㎝, 높이 연소부 25~120cm, 소성부 50~137cm에 달한다. 가마 바닥면의 경사도는 10°미만의 저경사(低傾斜)가 대부분이다. 

출토유물은 옹관편이 대부분이며 소성불량 옹관편과 받침용 옹관편으로 구분된다. 이외에도 옹관과 함께 소성한 완, 호, 시루, 주구토기 등의 토기류와 제작도구 등이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옹관은 옹관고분 성행기인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의 특징을 갖는 소위 ‘U’자형 대형옹관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오량동 요지는 5세기를 중심으로 100여년에 걸쳐 옹관전문 생산집단이 존재하였다고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생산된 것으로 보이는 크기가 기고 82~194cm, 구경 53~132cm, 구연부 두께 3~9.6cm에 달하는 이르는 대형 전용옹관이 과연 오량동 유적에서만 생산되었을까?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도 생산되었을까?

대형 전용옹관 생산이 가능한 구조

현재 확인된 오량동 요지의 많은 가마의 경사도가 10°미만의 저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가마 경사가 완만하고 소성실이 클수록 기물이 서서히 소성되어 가기 때문에 대형옹관을 생산하는데 적합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저경사도에 수평 연소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복암리 3호분에서 발굴된 것처럼 3m가 넘는 대형옹관을 세워서 소성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오량리 가마는 바람의 방향을 고려하여 구릉 남쪽에 위치하는 일반적인 지형의 입지를 고수하는 일반 가마와는 달리, 연도부 외곽으로 배연 시설을 마련하여 불을 효율적으로 조절하는 구조로 축조되어 있다. 이는 상시적으로 대형옹관을 생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와 관련이 깊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대형 전용옹관은 그 수요가 소수의 한정된 상위 계층의 무덤에 사용되는 묘제이기 때문에 대량 생산보다는 대형옹관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오량동 가마는 대형 전용옹관을 도맡아 생산한 유일한 도요일 가능성이 높다.
 
생산 규모면에서도 추정이 가능해

물론 오량동 가마와 같은 대형 전용옹관 가마터가 아직까지 다른 곳에서 출토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량동 가마가 대형 전용옹관의 유일한 생산기지라고 부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추정은 현재 발굴 조사된 오량동 가마에서 생산된 옹관의 대략의 숫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을 통해 이 물건을 생산한 집단의 성격 및 유통망의 범위도 헤아려 볼 수 있다. 오량동 가마터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가마가 77개, 조사된 것이 25개인데 대체로 가마의 규모가 비슷하다.

즉, 한 가마당 1회에 대옹 1개, 소옹 2개 정도 생산하고, 3회 정도의 보수 흔적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한 가마에서 대옹 3개 정도, 소옹 6개 정도 생산된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보면 오량동 77곳의 가마에서 대옹 221개, 소옹 462개 정도가 생산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전남지역에서 3~6세기에 조성된 대형 옹관고분이 87개소 480여기 정도라는 의견이 있는데 이 수치와 거의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이것을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 추정해본다면, 오량동 가마에서 생산된 대형옹관이 영산강유역 곳곳에 유통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 되겠다. 말하자면 오량리 요지에서 2.9km 떨어진 복암리 정촌고분을 비롯하여 8km나 떨어져 있는 시종일대의 대형옹관의 수요도 오량동 가마에서 공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3m나 되는 거대한 전용옹관을 수km나 떨어져 있는 시종 내동리는 물론 반남 신촌리까지 운반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고대 마한 당시, 육로보다 해로를 이용해 문물의 왕래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뱃길을 이용하여 가까운 나룻터로 운반한 다음 육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당시 육로도 내륙 방면보다는 영산강 본류나 지류의 충적지를 이용하여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동신대 이정호 교수의 지적은 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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