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5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영암
<4>해방을 맞은 영암의 정세

미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

미군의 영암진주

미군이 영암에 진주한 시기는 1945년 11월 초순이었다. 영암에 진주한 미군은 목포에 주둔했던 미 제55보병 중대로 이 중에서 15명을 영암에 파견하여 행정과 치안을 지휘하고 감독하였다.

미군정은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공산당을 원천적으로 탄압하였다. 미군의 배치가 불완전한 단계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인민위원회 활동이 용인되었다. 이때 까지는 남한 거의 전역에 군단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 대부분이 얼마 동안이라도 치안질서와 행정기능을 수행했다. 인공에서는 이시기를 ‘합법시기’라 하였다.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파괴공작은 영암에도 진행되어 영암인민위원회는 46년 2월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면서, 군수 조극환과 보안서장 조덕환이 정권탈취와 불법테러 혐의로 구속되었다. 미군정은 유성계(柳成溪)를 새 군수로, 조규보를 경찰서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함께 이승만이 이끌던 독립촉성회 등 우익인사 조철환 하헌찬 김상경 김학용 등으로 행정고문회를 설치하였고, 청년들은 ‘무궁청년단’을 조직하였다.

이로써 영암에서도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좌우익의 대립이 격렬해졌다. 좌익계의 찬탁과 우익계의 반탁을 둘러싸고 따로 군청 광장이나 초등학교 교정에서 집회를 열며 집회가 끝나면 시가행진이 벌어지곤 하였으며, 삐라를 뿌리고 밤에는 담벼락에 삐라를 붙였다.

미군정의 미곡수집령(米穀收集令) 등에 반발하여 영암군민 1천여명이 1946년 10월 14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경찰서를 습격하기로 결의까지 하였다. 말 그대로 혼란의 극치였다.

전라남도에서도 나주 화순 목포 해남 강진 영암 보성 함평 등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미군정의 미곡수집령 반발에 따른 추수봉기는 대구에서 1946년 10월 1일 시발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대구지역에서만 38명의 경찰관이 죽고 수많은 시민이 사살되었다. 

대구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해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꾸리고 시내 대부분의 파출소까지 점령해버렸다. 이를 두고 강준만 교수는 그의 저술 ‘한국현대사 산책’ 제1권에서 대구에 분 피바람으로 표현하였다.

선산지역의 항쟁은 박상희(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가 10월 3일 오전 9시경 2천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구미 면사무소와 선산 군청도 공격해 식량 130가마를 탈취하였다.

12월까지 전국적으로 확대된 10월 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이 200명 이상이 피살되었고, 죽은 관리, 시위 및 민간인 수는 1천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상희는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이 지역의 시위는 경찰에 의해 6일에야 진압되었다.

미군정의 미곡수집령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군정법령 제9호로 농업 및 농민정책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3·1제 소작료 실시 및 소작 조건의 개선’이었다. 이 조치는 소작료의 최고한도를 수확량의 3분의 1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하곡에 대하여도 소작료가 부과됨으로써 농민의 입장에서는 일제하에서의 ‘3·7제’와 별 차이가 없었다.

미군정은 또 미곡의 자유 판매제를 실시했으나 일본으로 미곡 반출과 투기꾼들의 매점매석으로 쌀값폭등이 일어났다. 이로써 일반 국민들의 식량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어서 미군정은 1945년 12월 19일 일반고시 6호를 발령하여 미곡 가격통제를, 1946년 1월 16일에는 법령 제45호로 미곡수집령을 공포하였으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원성의 대상이었다.
 
경찰과 군인의 충돌사건

1947년 6월 1일 신북지서에서 군인과 경찰 간의 충돌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날 신북지서에서 군인과 경찰 간의 작은 충돌이 큰 사건으로 확대되었으나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이 날은 일요일이어서 광주 4연대 소속의 김형남 하사가 외박 후 귀대하기 위해 신북지서 앞에서 차량 편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북 지서장이 김하사의 무궁화 표식으로 도안된 모표(帽標)를 보고 사쿠라 같다는 등 비꼬며 비하하는 데서 충돌이 발생하였다.

영암경찰서에서는 김만수 외근 형사 등 경찰관 5명을 출동시켜 김하사를 폭행 등의 혐의로 영암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 사건은 곧 광주 4연대에 보고되었고, 4연대 1대대 부관 김희준 중위와 군기대대장 정치웅 소위가 차량을 동원하여 신북을 거쳐 영암경찰서로 갔다.

경찰서 주위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김중위 일행이 경찰서로 들어가는 것을 제지하면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김중위 등은 경찰서를 나와 귀대 길에 올라 신북지서를 지날 무렵 20여명의 경찰이 공포를 쏘며 경비대원들의 차를 정지시켜 김중위 일행을 신북지서 안으로 끌어들여 무릎을 꿇게 하고 구타를 하였다. 때문에 군인들이 도립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영암경찰서로부터 보고받은 8관구 경찰청(현 전남경찰청) 고문관 퀴크리 대위가 4연대에 전화를 걸어 이 사건을 빨리 해결토록 촉구함으로써 어렵게 마무리되었다. 

위와 같은 시대상황에서 영암의 경우 6.25한국전쟁 이전부터 지방 좌익의 빨치산 활동이 극렬하였고, 군경과의 교전이 일어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암은 영산강을 끼고 있고, 내륙으로는 월출산과 국사봉이 있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지방 좌익의 입산활동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군경의 9.28수복이후 인접지역 좌익들이 영암으로 피난을 오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하여 영암에서는 적대세력과 군경에 의한 피해규모가 커지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경찰의 시위행렬 발포

건국준비위원회 영암지회 인사들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를 영암공원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하기로 하고, 신북 도포 덕진 시종 등 동북지역은 덕진에서, 군서 서호 학산 등 서부지역은 군서면 주암마을 앞에서 집결하여 양 방향에서 동시에 출발하여 영암공원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구림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은 영암에서 3.1절 기념행사도 하고 굿판을 벌인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오전 11시경이 되자 주암마을 앞 도로를 꽉 메워 200m나 이어졌다. 구림청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앞장서고 악대가 나팔을 불며 군중을 향해 연설이 한창일 때에 3.1절 기념행사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군서지서 차석으로 근무했던 하모의 지휘로 경찰학교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시위현장에 출동하였다.

경찰은 두 줄로 시위군중 앞에 진을 치고 이는 “불법집회이니 해산하라”고 하였으나 주최 측은 “집회의 자유를 막지 말라”고 대치상태에서 경찰이 20분 내에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며 경고하였다. 이에 시위대가 오히려 야유를 하면서 불응하자 경찰이 공포탄을 쏘았다.

이에 시위대가 동요하자 시위대 발부리에 대고 총을 난사하니 시위대가 흩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경찰이 주동자 고산리에 거주하는 현영삼과 죽정마을 최규택이 붙잡혀 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6개월 형을 목포형무소에서 살았다. 이때 주동자 중 한 사람인 오산의 박도열은 도망쳐 검거되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