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4>영암을 ‘왜’ ‘마한의 심장’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영산강유역에서 집중 출토되어 영산강유역을 대표하는 토기로 인식되고 있는 조족문 토기. 이 토기는 일본의 규슈, 긴끼 일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영산강유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오른쪽 사진은 영암 시종면 만수리 4호분 중심유구 토광묘.

필자는 본란을 통해 누차 영암이 마한의 심장임을 여러 기록과 유물들을 분석하여 실증하려 하고 있다. 지난 5월 말 그동안 영암에서 이를 간단히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오늘은 그  발표문을 토대로 그동안 다룬 내용을 압축하여 영암을 ‘마한의 심장’이라고 불러야 하는 까닭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내용을 적어도 우리 ‘영암인’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독자적인 문화 ‘영산지중해’의 센터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영암 아리랑’으로 유명한 가수 하춘화, 바둑계에서 ‘영원한 국수’로 알려져 있는 조훈현 모두 영암 출신들이다. 이들의 몸에 배어 있는 뛰어난 창조적인 재능들은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영암의 DNA(유전인자)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서울 숭실대학교 박물관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눈에 익은 유물, 즉 국사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있었던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국보 231호 ‘용범’ 즉 ‘거푸집’이 있다. 이 유물은 청동제품을 주조하던 틀로, 한반도에 독자적인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증거다. 그런데 이 유물이 우리지역 영암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영암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새삼 부각시켜 준다.

영암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사실은 영암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단정을 지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지역에 독자적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영산강유역을 통해 낙랑, 백제, 가야, 왜 등 여러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던 독자적 문화의 뿌리가 선사시대부터 비롯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곧 지리적으로 영산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영암지역이 새로운 문물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탄생시킨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영산강식 토기, 일본 스에끼에 영향

오사카 부립 치카츠아스카(近つ飛鳥)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 가운데 일본의 거대한 전방후원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百舌鳥고분군 인근의 스에무라 도요지에서 출토된 스에끼 토기들이 영산강유역 토기들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일본의 경질 토기인 수에끼 토기가 5세기 초 한반도로부터 전래되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는 대부분 일본 연구자들이 동의를 하고 있다.

이 토기들이 우리국사 교과서에는 가야토기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큐슈지역은 물론 近畿(긴끼)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보면 가야토기는 물론 백제, 영산강유역 등 여러 지역의 특성이 골고루 드러나고 있다.

특히 그릇 몸체에 구멍이 뚫려 있는 유공광구 토기 등에서는 영산강유역의 특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일본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껏 가야토기의 영향만을 강조하였던 연구는 재검토되어야 하며, 교과서 서술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 고유의 특질을 간직한 각종 토기

이제껏 국내 학계에서 ‘영산강식 토기’를 별도로 설정하지 않고 백제계열로 포함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학자들이 영산강식 토기를 금강 이북의 백제와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막연히 백제계라고 일괄 취급하였던 토기들 가운데 양이부호, 거친무늬토기 및 이중구연토기 등을 만든 집단과 조족문토기, 평저의 유공광구소호 등을 사용한 집단이 서로 구별되고 있다는 연구들이 이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후자에 해당하는 조족문 토기와 유공광구 소호 등의 토기는 전형적인 영산강식 토기로써 서울 풍납동에서 출토된 다른 토기들과 구별되고 있다.

주로 서해안의 주구묘에서 출토되고 있는 이중구연호는 전북 서해안이나 영산강 하류 일대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반해, 영산강 상류와 하류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공광구소호는  전북 서해안지역에서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영산강유역이 주 생산지였음을 알려준다. 동체가 대체로 球形이고 V字형의 목에 넓은 입(廣口)을 한 작은 항아리 형태이고 동체의 중간에 둥근 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인 유공광구 소호가 일본의 규슈와 긴끼지역 일대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이들 지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족문 토기 또한 대표적인 영산강식 토기라 하겠다. 평행집선문 위에 3, 4조의 사선을 배치하여 마치 새 발자국 흔적의 효과가 나오도록 토기 표면에 타날문을 새긴 조족문 토기는, 경기 하남 미사리, 청주 신봉동, 나주 반남 고분 등에서 출토되고 있지만, 특히 영산강유역에서 집중 출토되어 영산강유역을 대표하는 토기로 인식되고 있다. 이 토기 또한 일본의 규슈, 긴끼 일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영산강유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 밖에 그동안 주로 가야 쪽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던 승석문 토기가 최근 영산강유역 토기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가마 내의 횡치 소성 때문에 나타난 동체부의 함몰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는 이 토기는, 경남 함안지역 토기에서만 그 특징이 보일 뿐 다른 가야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영산강유역 곳곳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영산강식 토기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 토기 역시 일본의 긴끼 일대에서 출토되고 있어 영산강유역의 문화가 일본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한다.
 
영산지중해 세력, 영산강식 토기문화 형성

이처럼 ‘영산강식 토기’라고 명명해도 좋을 이들 토기들이 큐슈 지역과 긴끼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영산강유역 토기가 지역의 특징을 대표하는 토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산강유역 출토 토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토기들이 우리지역 시종의 신연리 9호분과 나주 반남 덕산리 출토 토기 파편들에서 찾아지고 있다. 이들 출토 유물들의 器種, 器形, 문양 등을 보면 시종지역이 반남 지역보다 더 이른 문화를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한의 심장 영암, 독자적인 문화 발전시켜

이와 같이 영암 시종지역이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데는, 영산지중해 입구에 연해 있어 선진문화 수용이 내륙 반남지역보다 용이하였던 데다, 배후의 비옥한 영산강 충적평야에서 생산된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대외교역의 거점 항구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던 남해포구를 중심으로, 주변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으로 대표되는 시종일대의 거대 고분군들이 이러한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

옥야리 방대형 고분은 기존의 영산강유역에 유행하였던 옹관 대신 석실분을 처음으로 받아들여 영산강식 석실분의 전형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석실 구조는 기존의 영산강유역과 차이가 있지만, 가야, 왜 등 주변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석실의 목주 위치나 벽석 구축방식 등 세부적인 특징은, 가야, 왜 등과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분구 가장 자리에 영산강유역의 토착적 묘제인 옹관묘, 목관묘가 추가적으로 조성되고 있어 영암 시종지역 토착세력들이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외부적 요소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외부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던 영산지중해의 중심에 영암지역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마한의 심장’이라 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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