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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의 항복소식에 만세 부르며 해방의 기쁨 누려■ 8·15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영암
  •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승인 2018.08.3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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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만세의 함성소리

영암에서도 일본 천황의 항복소식은 8월15일 당일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있었다. 
해방소식이 전해지자 밭에서 김을 매고 논에서 피를 뽑던 농민들도 일손을 멈추고 거리로 달려 나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러 영암 일대가 만세소리와 태극기의 물결로 가득하여 해방을 실감하였다.

그런가하면 일부 청년들은 영암공원에 올라가 일본인에 의하여 강제로 참배(參拜)를 해오던 신사(神社)에 불을 질렀다. 일본경찰이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숨을 죽이고 철수 준비에 여념이 없이 서두르고 있었다. 

해방당시 영암군청의 직원 구성을 보면 일본인은 5~6명이었고, 한국인이 70명 정도였으며, 군수는 일본인이나 그의 이름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영암면장은 일본인 하합(河合)으로 그는 영암농장과 영암운수를 경영하였는데 8월 15일이 지난 며칠까지도 면사무소에 출근하였는데, 직원 한 사람이 천황사진을 떼어 박살을 내자 눈물을 흘리고 사무실을 나간 후 자취를 감춰버렸다.

군서면 구림에서도 해방의 소식은 8월 15일 당일 구림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농민들은 벼논의 마지막 김매기인 만들이까지 마치고 가을채소 밭갈이에 한창이었다.

해방소식을 들은 구림의 농민들은 일손을 멈추고 해방의 기쁨에 호미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약속이나 한 듯이 회사정 뜰과 학교마당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모여 들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서 구림 공립보통학교 위쪽에 일본 조상신이라고 하는 아미테라스 오미가미(天祖大神, 일본의 개국신)의 지방을 붙인 가미다나(神架) 밑에 정화수를 떠놓고 학교직원들이 박수를 치며 머리를 조아리고 경배를 하던 그 신성한 가미다나를 일본선생이 보는 앞에서 뜯어내려 운동장 한 가운데 있는 느티나무 아래서 불을 붙여놓고 부채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죽정마을에 사는 최태석이었다.

불타버린 일본신사

그러는 사이에 회사정과 학교 운동장에는 수백 명의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어서 최태석은 “저 봉안전(奉安殿)도 없애 버리자”고 외쳤다. 그러자 주민들은 창고에서 운동회 때 사용하던 줄다리기 할 때 쓰던 줄을 끌어내 봉안전에 걸고 구령에 맞춰 끌어 내리면서 함성을 질렀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 구로사와 교장 집에서 대책을 숙의하고 있던 주재소 순사부장 도자(稻子)가 나타났다. 이에 주민들은 도자를 회사정 뜰 아래로 꿇어앉히고 모자를 벗기고 칼을 뺏었다.

이 때 반항하던 도자는 주민들에게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견장이 뜯겨 나갔다. 주민들은 도자한테서 뺏은 칼로 양 어깨를 치며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도자는 꿇어앉은 자세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어 놓아주니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줄행랑을 쳐 달아났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주민들이 불어나 그 길이가 무려 300m나 이어졌다. 이어서 주민들이 최태석의 뒤를 따라 학암마을 황산 꼭대기에 있는 일본신사(神社, 일본에서 왕실의 조상 또는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를 손으로 뜯고 발로 짓밟다가 불태워 버렸다. 이때 신근정 마을에서 거주하는 최규란(서울 보성중학교 졸업)이 합세하여 열기는 더 고조되었다. 이처럼 해방의 기쁨을 나누고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해가 질 무렵에야 삼삼오오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어서 저녁에는 이웃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이런 저런 얘기로 밤이 늦은 줄도 몰랐다.     

도포에서도 지서주임이 일본 사람이었는데, 주민들이 지서주임을 도포 배수갑문으로 끌고 가서 뺨을 때리고 발로 걷어차며 분풀이를 했다. 이에 지서주임은 살려달라고 애걸했다고 송동암 옹은 당시를 술회하였다.
 
영암경찰서 무장해제 담판
 

일본이 항복했으니 영암경찰서 경찰들의 무장을 해제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구림의 고재섭· 최상호·최규문·최규철·조인택 등 지도층과 청년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8월 18일경 고재섭(구림에 거주한 지주. 담양출신으로, 광주고보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미군정 때 인민위원회가 무력화되면서 영암을 떠난 것으로 알려짐)을 필두로 청년들과 마을 사람들이 영암으로 몰려갔는데 비가 오는데도 어린 아이들까지 뒤쫓아 가는데 영암읍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어 대규모 군중집회가 되었다.

이때 고재섭이 군중들 앞에 나와 “패전으로 항복한 일본 군경의 무장을 주인인 우리가 해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자 군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재섭을 비롯한 대표가 경찰서로 들어가 담판을 벌였으나 승전국인 미군도 아닌 민간인에게 무장해제를 당할 수는 없었다. 협상결과 무장해제의 상징으로 총 두 자루를 대표들이 들고 나오니 군중들의 박수와 만세소리가 영암읍에 요동쳤다.

그런가 하면 구림사람들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반출해가기 위해 해창 창고에 쌓아 둔 쌀을 배로 구림까지 가져와 집집마다 한두 가마니 씩 나누어가져 갔다. 

일본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분풀이가 영암군내 곳곳에서 일어났고, 친일 분자에 대한 보복도 있었다. 온통 영암사회가 들뜬 분위기였다.

일본인들은 금융조합에 예치된 현금 확보와 재산 문제로 난관에 처했는데 그 이유는 적산(敵産)이라 하여 이들에게 관계자들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암에 체류하던 1천여 명의 일본인이 해방이 되면서 목포항을 이용하여 물러갔다.

당시 영암 면장이던 일본인 하합은 자취를 감춘 후 영암거류민단 단장으로 일본인의 귀국을 위해 활동하다 자신은 제일 늦게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건국준비위원회 영암지회 설립

해방의 환희와 일본인의 철수 등으로 영암에서도 다른 지역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 주로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영암사회에서 명망이 있는 조극환·유혁·고재섭 등이 8월 17~18일경에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영암건준 주요 참여자의 명단과 활동분야를 보면, 위원장에 조극환(3.1운동, 노동운동, 신간회 활동, 사회주의 운동) 부위원장에 고재섭(지주, 담양인으로 미군정 때 영암을 떠남) 보안부서장에 임병남(독립운동, 한국전쟁 전 피살) 위원에 이창희(노동운동, 야학운동, 미군정 때 피살) 최상호(농민회, 한국전쟁 전 피살) 유근욱(농민조합, 월북) 최규동(농민조합, 한국전쟁 때 군당 인민위원장) 최규문(광주학생운동, 한국전쟁 때 경찰에 피살) 문학연(광주학생운동, 한국전쟁 때 경찰에 피살) 김필재(광주학생 운동,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조사원(3.1운동, 신간회, 한국전쟁 때 입산)이 활동을 했다.

그리고 선출에 의하여 치안은 보안서장 조덕환이, 행정은 군수 조극환이 각각 맡아 영암의 치안과 행정을 맡아왔다. 조극환은 한성사범을 졸업하고 영암공립 보통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영암의 3.1만세 운동 등 독립운동을 주도해왔고, 해방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 영암위원장을 맡아오다 여운형이 설립한 건국준비위원회가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인민위원회로 통합되어 개편되면서 영암건준도 영암인민위원회로 개편, 위원장 자격으로 군수직을 맡아왔다. 이때까지는 좌익과 우익의 구별이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글=조복전(영암역사연구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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