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북면 행정리生 법무법인 이우스 대표변호사 민변 광주전남지부 지부장 전라남도 행정심판위원 소청심사위원

민사재판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일수록 법적인 분쟁이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되어 법정에 서게 되는 경우 법원이 스스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알아서 잘 판단해 줄 것으로 막연한 기대를 갖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인들의 사법부에 대한 막연한 신뢰와 기대는 민사소송의 특성인 변론주의와 입증책임 등의 제도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때로는 재판결과를 놓고 사법불신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일반인들이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특성과 차이를 알지 못해 민사재판의 경우에도 형사재판과 마찬가지로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사실관계라도 재판부가 실체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직권으로 조사하고 판단한다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로서 법정에서 만나게 되는 일반시민들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양 당사자가 모두 아는 사실을 판사만 모르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민사재판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정황 중의 하나일 것이다.

민사소송에서는 변론주의의 원칙상 사실과 증거 등 소송자료의 수집책임은 당사자에게 맡겨져 있고, 법원은 당사자가 수집하여 변론에서 제출한 소송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변론주의와 입증책임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는 당사자 스스로 주장을 정리하고 증거수집에 만전을 기하려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일반시민으로서 권리위에 잠자는 자는 구제받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 자신의 법률관계에 관한 계약서 등의 처분문서와 금융자료나 관련 증인들을 꼼꼼히 챙기는 노력이 필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론주의와 입증책임의 제도상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판결이지만, 실체적 진실과는 명백히 다른 판결이 실제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선고될 수 있다는 사실을 문제의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분명히 돈을 빌려 준 것이 사실이지만 빌려준 사실을 입증하지 못해 패소하는 경우나 반대로 돈을 빌리고 이를 모두 변제하였더라도 빌린 돈을 변제한 사실을 입증하지 못해 패소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구체적 재판과정에서 돈을 빌려준 사실뿐만 아니라 돈을 빌리지 않은 사실도 입증되지 않았으니 판결을 선고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입증책임에 따라 재판의 결과는 돈을 빌려준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원고가 입증하지 못하였으므로 원고가 패소부담의 불이익을 입게 되는 것이다.

입증책임제도는 이처럼 인간의 인식과 기억능력이나 당사자의 입증노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 경우에 법원이 진위불명(眞僞不明)이라는 이유로 재판을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고, 사실이 증명될 때까지 마냥 재판의 진행을 연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위불명 상태에서도 판결이 가능하도록 고안해 낸 고육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변론주의는 소송수행 능력이 평등한 쌍방 당사자의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소송의 당사자는 완전하거나 평등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통상적이다. 특히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하지 못하고 당사자 스스로 소송수행을 하는 본인소송의 경우에는 충분한 소송자료의 수집과 제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실제 현실에서 소송자료의 수집과 제출에 관하여 법원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채 변론주의를 기계적이고 형식적으로만 적용한다면 당사자의 소송수행 능력 부족으로 승소할 사안임에도 패소를 당하는 폐단과 불합리가 발생하게 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맹아가 싹트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변론주의와 입증책임이 아무리 중요한 민사재판 절차에서의 제도라고 하더라도 변론주의도 기계적·형식적 관철보다는 보완과 수정논의가 필요하고, 입증책임도 진위불명에 대한 재판 불가능 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보완책일 뿐이라는 사실을 사법부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민사재판 절차에서도 소송의 스포츠화를 막고 실체진실 발견이라는 목표를 아예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법부와 국민 사이의 인식의 괴리를 좁히고 판결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국민과 소통하는 사법부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변론주의와 입증책임 제도의 사각지대에 일반시민을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변론주의와 입증책임의 법리에 기대어 쉽게 사건을 해결하려는 태도보다는 충실한 소송절차의 안내, 소송구조제도의 활용을 통한 본인소송의 보완, 적절한 석명권의 행사, 입증촉구 등을 통하여 당사자에게 전혀 예측 불가능한 판결이 선고되는 결과를 재판과정에서 줄일 수 있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더불어 재판부뿐만 아니라 변호사를 포함한 법률가들 전체가 법리보다는 사실관계의 확인과 규명에 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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