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3>영산강유역 마한사 연구의 중요성과 과제

마한에서 신라와 가야의 원형인 진한과 변한이 갈라져 나왔고 백제 역시 마한에서 땅을 얻어 세워진 나라이다. 곧 마한은 백제는 물론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에 있는 고대국가의 뿌리인 셈이다. 따라서 마한사가 한국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백제의 일부로 인식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가야사와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진흥과 관련하여 관심이 일어나고 있는 마한사 연구는 전남도와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기본계획이 수립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짜깁기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좀더 거시적인 접근과 함께 미시적인 연구도 함께 진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광주, 전남·북 광역단체를 중심으로 2018년 전라도 정도1000년을 기념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고려이후의 전라도 역사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에 편입되기 전 전라도지역의 마한사는 우리 전라도 역사의 뿌리에 해당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선사이래 우리지역 자연환경과 역사가 쌓여 지역의 역사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한국 고대사의 원형을 이해하고 전라도의 정체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마한사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3세기 후반 목지국 중심의 마한 연맹체가 해체되면서 한강유역 백제중심 연맹체와 해남반도에 있는 침미다례 중심 남부 연맹체가 차령산맥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어쩌면, 고려 초에 획정된 전라도 행정구역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한 정복설 등 기존학설 재검토 돼야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전남 남해안 일대가 백제 영역이 되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말하자면 전북과 전남내륙 지역은 그 이전에 이미 백제 지배하에 들어간 셈이 된다. 백제의 마한 정복설 주장은, 1959년 이병도 박사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을 근거로 주장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따르고 있다.

이에 대해 영산강유역에 집중된 옹관고분이 백제식 석실분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6세기 전반까지는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다는 ‘마한론’이 제기되었다. 마한론은 삼국사나 가야사보다 연구가 취약했던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이 지역 정체성을 실증적으로 찾으려 한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마한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4세기 후반 이 지역을 지배하였던 백제가 5세기에 들어 고구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남진정책에게 밀린 틈을 이용하여 백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 또한 영산강유역 출토유물에 보이는 백제적 요소를 과도하게 해석한 것으로 마한 정복설 논리의 범주 안에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6세기 중엽의 다시들 복암리 고분군의 묘제나 출토 유물들을 보면 영산강유역의 독자적 특질이 훨씬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영산강유역이 백제 지역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주장 또한, 필자는 동의하기 어렵다.
 
6세기 중엽까지 백제와 정립하는 세력 형성

이러한 논란의 핵심은 영산강유역 마한과 백제의 관계를 밝히는 것에 있으므로, 이 지역 마한 연맹왕국의 실체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영세한 기록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침미다례’ 왕국의 경우, 일본서기에 근초고왕 때 ‘도륙’을 당했고, 중국에 조공 갔다는 중국측 기록이 있어 꽤 주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산강유역설, 해남반도설, 고흥반도설 등 위치조차 확실히 결론이 나와 있지 않다.

필자는 해남반도의 ‘침미다례’와 영암 시종·나주 반남 지역의 ‘내비리국’ 등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마한남부 연맹의 핵심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침미다례’가 근초고왕 때 백제영역이 되었다는 통설은, 백제 지배가 계속되었다면 ‘백제적 요소’들이 영산강 곳곳에 보여야 하나, 5세기 말까지 출토유물 성격이 백제계 보다는 가야계나 왜계, 심지어 신라계 비중이 클 뿐 아니라 백제가 침미다례를 ‘도륙’ 냈느니 ‘남만(南蠻)’이니 하는 격한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다.

영산강식 토기 등은 독자적 정치체 존재 입증

 

영산강식 토기와 각종 유물들은 독자적 정치체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영암은 마한의 심장이었다. 사진은 시종 옥야리에서 출토된 이중구연호 및 평저단경호.

3세기 말 ‘침미다례’와 함께 중국에 조공을 갔던 20여국 실체도 중요한데, 필자는 마한남부 연맹을 구성한 세력으로 보고 싶다. 영암 시종·나주 반남 일대에서 거대한 옹관고분을 조영하고, 신촌리 9호분 등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환두대도를 사용하며 백제, 가야, 왜 등 여러 지역과 교류를 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세력들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 규슈, 긴기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유구광구소호’, ‘조족문 토기’, ‘승석문토기’ 등은 일본에서도 ‘백제 토기’가 아닌 ‘전라도 토기’라고 하여 ‘영산강식 토기’ 임을 분명히 하였다.

‘영산강유역식 토기’라고 명명해도 좋을 이들 토기들이 큐슈지역과 긴끼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영산강유역 토기가 지역의 특징을 대표하는 토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산강유역 출토토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토기들이 영암 시종의 신연리 9호분과 나주 반남 덕산리 출토 토기 파편들에서 찾아지고 있다.

이들 출토 유물들의 기종(器種), 기형(器形), 문양 등을 보면 시종지역이 반남지역보다 더 이른 문화를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종면 일대는 영산지중해 입구에 연해 있어 선진문화 수용이 내륙 반남지역보다 용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시종지역도 반남지역 못지않은 대형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두 지역의 출토 유물들의 성격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신연리와 덕산리의 영산지중해상에 위치한 연맹세력들이 하나의 단일한 정치체인 ‘내비리국’을 형성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정치체의 형성이 영산강식 토기로 상징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믿어진다.

이처럼 이 지역 고유의 특질이 반영된 ‘영산강식 토기’는 독자적인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영산강유역에서 출토되는 금동관, 하니와 등 각종 유물에서도 백제, 가야, 왜 등과 교류를 하며 형성된 재지적인 특성이 많이 보인다. 이것은 ‘영산강식 토기’가 다양한 문화 접촉을 통해 탄생한 독자적 산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이곳에는 3, 4세기는 물론 5세기까지도 백제와는 무관한 정치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마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있는 ‘내비리국’과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침미다례’ 대국이 그들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한남부 연맹이 백제 중심의 북부 연맹과 각축을 하였다고 본다.

보성강유역 비리국, 순천 불사분사국 등도 영산강유역 및 가야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지만, 마한 연맹체의 특질을 기저에 두고 있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성립된 마한남부 연맹은, 연맹내부 및 주변국과 교류를 통해 형성된 개방적 성격과 재지적인 특성이 어우러져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영암은 마한의 심장이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영암이 ‘마한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한반도에 독자적인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인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국보 231호 ‘용범’ 즉 ‘거푸집’이 서울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그 유물이 우리영암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은 영암지역이 차지하는 개방적이고 독자적인 역사적 의미를 확실히 해준다.

영암지역이 영산강유역을 통해 낙랑, 백제, 가야, 왜 등 여러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던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겠다. 곧 영암지역이 영산지중해의 거점항구 역할을 하며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옹관고분 중심의 영산강유역에 독창적인 석실분과 분주토기 등을 도입한 시종 옥야리 고분 등을 통해 충분히 살필 수 있다.

마한사 연구, 영암군이 총본산 돼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및 대학수학능력시험 등에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복속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진실인 것처럼 각인되고 있다. 따라서 고대 마한의 심장이었던 영암군이 학술연구를 후원하고, 연구성과를 공유하여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는데 앞장서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객관적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막연히 ‘마한축제’ 등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관념적으로 흘러 공감대가 쉽게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왕인박사가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는 사이에 논란의 중심에 처해지면서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광역자치단체, 중앙정부와 연결되어 발굴사업 및 마한촌 건립 등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이어져 오랫동안 역사에서 망각되어 있던 찬란한 마한사의 참모습을 찾도록 해야 한다. 마한사를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이 기회에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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