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5 해방,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영암

1945년 8월 17일 건국준비위원회수립장면(YMCA건물)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본 통치

물론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술 한바와 같이 일본총독부에서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을 고문으로, 실무자들의 업무지속, 일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350권에 달하는 비망록, 한국인 관리들의 임명에 대한 일본인의 추천권 등은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본의 통치’였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미국의 대한 정책은 민족의 자주세력을 억누르고 우파정권을 수립했다는 주장과 남한 내의 친공 세력을 분쇄하고 냉전의 최전선으로서 반공정권을 수립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으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할 것이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기는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한반도 내에 있는 자국민의 안전귀환이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 치안권을 맡아줄 인사로 항복 선언 며칠 전부터 송진우와 교섭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낭산 김준연에게도 타진했지만 김준연도 이를 거부했다. 다음으로 여운형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여운형의 주도 하에서 국내치안과 행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남한은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여운형이 1944년 8월 10일 비밀리에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을 근간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를 조직하여 국내치안과 행정을 담당했고,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군정은 남한에서 미군정 이외는 어떤 경우에도 정부나 국가를 호칭하는 정당이나 사회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조선인민공화국도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인공도 미국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것에 대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미군정은 1945년 12월 12일부로 인공을 불법단체로 간주했다.

이러한 정치상황에서 정치단체들은 극우와 극좌로 나뉘어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좌익은 조선 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고, 우익은 한국 민주당(한민당)을,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국 독립당(한독당)을 만들었다.

한국 민주당은 김성수와 조병옥 등이 우익을 통합하여 9월16일 한국 민주당을 결성했고, 당 대표로는 수석총무인 송진우를 선임했다. 한민당의 중심세력은 김성수·송진우·김준연 등 동아일보 계열과 지주나 자본가 세력을 대표했으며, 해외유학을 한 지식계층이 많이 참여했다. 미군정에서 한민당의 조병옥·장택상이 경찰권을 장악함으로써 한민당이 정당 활동을 하는데 유리했다.

조선 인민공화국은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20여일 만에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 조선인민위원회와 통합한 후 박헌영의 재건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으로 통합되었다. 조선공산당은 해방 후 다른 정치세력에 비해 강력한 대중조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국내 상황에서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단체와 인사들이 귀국했다. 북한에는 주로 만주나 중국 연해주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했던 김일성·김원봉·무정 같은 인사들이 귀국했다.
남한에는 외교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해오던 구미위원회의 이승만과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김구·신익희·조소앙 등을 중심으로 한 요인들이 1945년 말까지 귀국했다.

김준엽·장준하 등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광복군 요원과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던 지청천 등이 1947년 4월까지 속속 귀국했다.

그런가하면,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되었던 학생 등 젊은이들과 강제징용에 갔던 사람들이 귀국했다. 

그런데 주목할 사항은 이승만의 귀국 경로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필리핀 마닐라를 경유하여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하와이와 괌을 거쳐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5일간을 머물면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나고 나서 10월 16일 오후 5시 미공군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하지가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도쿄에서 5일간을 머물면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나 무었을 논의했냐는 것이 풀리지 않고 있다. 다만 그들의 회동 목적은 남한에서 반공(反共) 반소정책(反蘇政策)을 어떻게 추진해갈 것인가로 추정할 뿐이다. 하지는 이승만과의 회동사실을 자신의 참모들에게까지 숨겼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서울도착에 깜짝 놀랐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

미군정이 인공을 부인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공이 공산주의 원조국(元祖國) 소련으로부터 배후조정을 받고 있다고 간주하여 이들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부인하고 탄압했다.

특히, 1946년 5월 15일 정판사 위조지폐사건과 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동사건을 계기로 인공을 불법단체로 인정하고 탄압함으로써 박헌영의 남로당 등 사회주의 계열은 지하로 들어가거나 깊은 산으로 들어가 주로 야밤을 이용하여 빨치산 활동(게릴라전)을 6.25한국전쟁 전후까지 계속했다. 그래서 이들을 ‘밤손님’이라고 했다.

박헌영과 이강국의 드라마 같은 월북

미군정은 1946년 9월 6일 박헌영과 이강국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1946년 10월 11일 영구차를 타고 관속에 숨어 월북한 뒤 해주에서 남한의 좌익세력을 관리했다. 이강국은 독일 베르린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 자신의 애인인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했다.

김수임은 당시 미군 헌병감인 대령 베어드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고 있었는데, 미군헌병이 운전하는 사령관차에 이강국과 동승해 38선까지 검문을 피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김수임은 1950년 3월 5일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1950년 6월 16일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46년 한인화(韓人化) 작업을 마친 미군정은 47년 2월 5일 민정 장관에 안재홍을 임명했고, 2월 15일 각 부처의 장 및 도지사를 경찰국장에 조병옥, 수도청장에 장택상 등 전부 한국인으로 바꾸고, 미국인은 고문으로 앉혔다. 이때에 김준연을 서울대학교 총장에 지명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

미군정하에서 우리 사회는 좌익과 우익의 극단적인 대립과 대결이 행해졌다. 우익 진영에서도 정치 집단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여 정치는 물론 사회 모든 분야가 불안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이처럼 불안과 혼란한 상황에서 47년 7월 한 달 동안에 무려 128건의 테러가 발생하여 36명이 사망하고 385명이 부상을 당했다.

8월에는 68건의 테러로 17명이 죽고 15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68건 중 37건이 우익에 의해 저질러졌고 16건은 좌익에서, 나머지 15건은 불명이었다. 우익의 37건 중 36건이 좌익에 대한 정치적 테러였다.

송진우(1945년 12월 30일) 여운형(김두한이 관리하는 조직원 18세의 한지근에 의해 1947년 7월19일 피살) 장덕수(한독당 계열에 의해 1947년 7월 12일) 김구(CIA요원으로 알려진 육군소위 안두희에 의해 1949년 6월 26일)등과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우익진영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암살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