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가고 미국 성조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1948년까지 미군정이 실시됐다.

<1>들어가는 말

한반도가 올해로 일본의 사슬에서 벗어난 지 73주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슬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 일제는 물러갔으나 미국과 소련의 세계정책으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점령군의 자격으로 이 땅에 진주했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항일투쟁을 해오던 우리 민족은 미·소에 의해 적대세력으로 돌변하여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했다. 미군정을 거치면서 남한에 혼란은 가중되었고 남북한이 단독정부를 수립을 함으로써 6ㆍ25한국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는 김일성과 스탈린 모택동의 오판에 의해 김일성이 일으킨 남침으로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러한 한국사의 비극은 영암을 비켜가지 못했다. 해방직후 영암에서는 3ㆍ1운동이후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조극환 등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후 건국준비위원회가 영암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2월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었고, 조극환 등은 구속되었다.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강제 해산하면서 영암에서는 좌익과 우익간의 대립이 촉발했다. 미곡 수집령(米穀收集令)에 따른 농민들의 반발은 1946년 10월 14일 1천여 명이 집회에 참가했고, 이들이 경찰서 습격을 결의하는 형태로 분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영암이 한반도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한반도의 변방에 위치하면서도 이러한 한반도의 격동기에는 항상 그 중심에 있으면서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점들을 돌아보면서 역사의 거울로 삼았으면 하는 충심에서 73주년 광복절을 맞아 개괄적이나마 8ㆍ15 해방과 미군정기 및 6.25한국전쟁시기에 있었던 영암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2>해방의 감격은 잠시뿐

심훈은 1930년 일제하에서 해방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간절한 소망을 그의 작품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할양이면 / 나는 밤하늘에 까마귀 같이 / 종로인경을 머리에 드러 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의 오리가(이하생략)

우리 민족이 그렇게 갈망하던 해방!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한반도는 해방되었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를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박경리의 작품 ‘토지’ 중에서)

   
그러나 그 기쁨, 그 환희, 그 감격은 잠시뿐이었다.
조국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세계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이 원치 않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그 강대국들의 이념 체제하에서 남과 북이 서로가 서로를 타도시켜야 할 적으로 변하여 6.25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격어야 하는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아직도 정전상태이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3>누구를 위한 미군정인가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강점하고 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이북 북한에는 치스차코프 사령관 휘하의 소련 제25군 12만5천 병력이 8월 24일까지 평양을 비롯한 북한에 진주했고, 남한은 미군이 점령군 자격으로 진주했다.

한국을 적으로 간주한 미군
“한국인을 적으로 간주한 미군” 남한에는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24군단 7만여 명이 하지 중장을 사령관으로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 자격으로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들어와 아베 노부유기 조선총독부 총독과 주둔군 사령관의 항복을 받았다.

미군은 9월 9일 서울로 진주해 38선 이남지역에 대한 군정을 선포하면서 이날 오후 4시30분 조선총독부 정문에 걸린 일장기를 내리고 그 자리에 성조기를 게양했다.

9월 7일에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은 다음과 같다.
제1호,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지위로 한반도에 들어갈 것이며,
제2호,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 없이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이로부터 미군은 1948년 8월 15일 우리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약 3년간 군정통치를 했다. 사령관에 육군중장 하지, 군정장관에 육군소장 아놀드, 경찰 책임자에 헌병사령관 육군 준장 로렌섬, 서울시장에 육군소장 키랑프가 임명되었다.

미군은 우리나라가 전범국가나 적성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천항에 입항해서부터 점령군의 자격으로 한국인을 모욕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대우를 했다.

1945년 9월 7일 미군이 인천항에서 상륙한다는 소문을 듣고 군중들이 모여들어 다소 혼란이 발생하자 이를 저지하는 일본경찰이 이들을 향해 발포하여 2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미군은 오히려 일본 측을 두둔했다.

그런가하면, 9월 6일 미군 선발대는 육군 준장 헤리스가 이끄는 37명이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내려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호텔에 투숙했을 때부터 일본관리 및 장교들과 곤드레 만드레가 된 채 흥청거린 연회를 가졌다.

이들은 여운형 계열에서 보낸 미국의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여 영어에 능숙한 한국인 백상규 등 3인의 접견을 거절했다. 

조선을 미국의 적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기본자세는 9월 7일에 발표된 포고령 제1호와 제2호 및 제3호로 구체화되었다. 곧 ‘병을 주고 약을 주는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이 종료되기 전 2천여 명에게 일본에 관한 교육을 시켰으나 한국에 대해선 단 한사람도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들 미군들은 인천항에 정박해 있으면서 배 안에서 며칠간 학습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미군의 한국에 대한 무지의 실태는 군정기간 내내 오류를 범했다. 이러한 실태를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온 미군’이라고 김기협은 그의 저술 해방일기에서 지적했다.

미군은 9월 9일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기로부터 항복을 받고 군정을 선포한 뒤 12일 총독과 경찰국장을 해임하고 15일 국장급 이상을 해임했다. 그러나 해임된 간부들은 고문으로 위촉했고, 과장급 이하 실무자들은 업무를 보게 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지 9월 11일자 사설에서는 “우리는 일본 쓰레기에는 무르고 우리가 해방시키기로 한 백성들에게는 억압적으로 대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썼다.

점령군은 모든 행정에서 일본인들에게 절대로 의존했다. 일본인들은 10월까지 약 350권의 비망록을 영어로 작성하여 미 군정청에 제출했으며, 한국인 관리들을 임명할 때에도 추천권을 행사했다. 하지가 신문기자들에게 “사실 일본인들이 가장 신뢰할 만한 나의 정보원이었다.”라고 실토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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