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1>마한의 표상(表象), ‘鷹準(응준)’(中)

녹유탁잔과 금동대향로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탁잔’은 백제 영역에서 출토된 매우 희소한 토기다. 사진 오른쪽은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대향로의 맨 윗 봉우리에는 사슴의 모습이 있어 부여계를 대변하고 있다.

‘마한의 심장, 영암’을 슬로건으로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 ‘영산강유역의 마한사 연구현황과 과제’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본란을 통해 누차 이야기 한 영암이 ‘마한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다시 강조하였다.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있었던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국보 231호 ‘용범’ 즉 ‘거푸집’, 다시말해, 한반도에 독자적인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인 이 유물이 우리 영암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영암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확실히 해준다고 하였다. 영암지역이 영산 지중해의 거점항구 역할을 하며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옹관고분 중심의 영산강유역에 독창적인 석실분과 분주토기 등을 도입한 시종 옥야리 고분 등을 통해 충분히 살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및 대학수학 능력시험 등에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복속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진실인 것처럼 각인되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고대 마한의 중심지였던 영암군이 주도적으로 학술연구를 후원하고, 연구성과를 공유하여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객관적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막연히 ‘마한축제’ 등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관념적으로 흘러 공감대가 쉽게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왕인박사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논쟁의 대상이 되다보니 점차 소외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절대적 지위

현재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탁잔은 백제 영역에서 출토된 사례가 아홉에 불과할 정도로 희소한 토기라고 한다. 녹유는 당시 아직 중국의 청자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것으로, 현재 녹유제작과 관련된 단서가 발견된 곳은 부여 쌍북리 요지와 동남리 요지 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녹유그릇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최상위층 등의 제한적 수요를 위하여 소량으로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중한 녹유제품을 전세(傳世)하지 않고 부장품으로 사용한 사례는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경우가 유일하다. 거기다 전실 앞의 제사행위에 직접 사용된 토기를 깨뜨려 함께 부장해버리는 행위 또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 사자(死者)의 배타적 소유를 염원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1호분의 피장자의 지위가 절대적인 존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복암리 1호분 출토 녹유탁잔은 녹유를 시유한 유개잔과 잔 받침이 한 조를 이루고 있는데,  잔 뚜껑은 녹유가 많이 벗겨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잔 받침의 내면에는 1줄, 외면에는 2줄의 횡침선이 돌려져 있고, 바닥 외면에 2자(字)의 묵서 명문이 있다. 

녹유의 박리가 심하여 분명하지는 않지만 윗 글자는 ‘응’(鷹)으로 추정되고, 아래 글자는 ‘人’변이 확인되고 있다. ‘鷹’자를 기준으로 살필 때, 기왕에 백제의 별칭이라고 이해된 ‘응준’의 ‘隼’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최초 발굴 조사팀에서 살폈지만, 필자 또한 동감이다. 말하자면 복암리 1호분 피장자가 백제의 별칭이었다는 ‘응준’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갖는 의미는 대단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지위지동이전 기록과 ‘응준’

응준(鷹隼)은 ‘매’와 ‘새매’ 즉, 매의 총칭으로 사용되며, ‘용맹한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필자는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전에 “마한의 사람됨은 몹시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라고 한 기록을 떠올렸다. 말하자면 당시 마한인들은 ‘응준’처럼 용맹스러웠다는 후세에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진서 사이전에도 “(마한 사람들은) 성질은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고 하여 마한인들의 용맹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역시 같은 사이전 기록에 “나라 안에 역사(役事)가 있으면, 나이가 젊고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등가죽을 큰 노끈으로 꿰어서 지팡이에 그 노끈을 매어 내두르게 하면서 종일토록 소리를 지르고 일을 하지만 조금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활과 방패와 창을 잘 쓸 줄 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마한사람들의 용맹함을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마한인들이 중국에 조공을 하지 않는 등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 강건한 전통을 지녔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서 사이전 마한 조에 “풍속은 기강이 적고, 꿇어앉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거나,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라고 하여 마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 또한 마한이 중화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한다.

아울러 마한남부 연맹과 대립을 하였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을 가능성도 있다. 여하튼 일련의 이러한 중국 측 기록들은 마한의 강성함을 알려주는 사례라 할 수 있고, 매의 의미를 지닌 ‘응준’이라는 명문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마침 복암리 1호분 피장자에게 ‘응준’이라는 칭호가 붙여진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제왕운기에 보이는 ‘응준’

고려후기에 서술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후왕(백제 성왕을 지칭함) 혹은 남부여라고 부르거나 혹은 응준으로 부르며 신라와 싸웠다(後王或號南扶餘 或稱鷹準與羅鬪)”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를, 전주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백제의 별칭으로 ‘남부여’, ‘응준’, ‘라투’가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羅鬪’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신라와 싸웠다’는 동사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분명한 것은 성왕 때 백제를 ‘남부여’, 또는 ‘응준’으로 불렀다고 하는 사실을 제왕운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백제 성왕이 동왕 16년에 사비로 천도하면서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에 나와 있고,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어 잘 알고 있다. 이처럼 백제가 ‘남부여’라고 국명을 바꾼 것은 백제왕실이 부여족을 계승하였다고 하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475년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부여계 백제 왕실은 494년 북부여가 고구려에 복속되자 그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사슴=백제(남부여), 응준(매)=마한남부 연맹

그렇다면 ‘응준’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응준이라는 명칭이 제왕운기에 ‘혹 남부여, 혹 응준’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남부여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조법종 교수는 응준이라는 명칭이 ‘매’를 뜻하기 때문에 신라를 닭을 뜻하는 ‘계림’, 고구려를 늑대를 뜻하는 ‘맥·예맥’이라 칭하듯이, 백제는 매를 뜻하는 ‘응준’을 별호로 사용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살폈다. 이러한 해석은 그럴듯하나 필자는 의견을 달리하고 싶다. 

백제는 국왕들이 사슴 사냥을 즐겨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슴을 주된 희생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여에서 우연히 출토된 유명한 백제 금동대향로의 맨 윗 봉우리에 있는 사슴을 사냥하는 모습 또한 이러한 사실의 구체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부여계를 대변하는 동물은 ‘매’가 아니라 ‘사슴’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하여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관련하여 매를 신의 화신 또는 최초 샤만의 조상 등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마한지역에 유포되었다는 견해는 시사적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예맥족의 새, 사슴에 대한 신앙이 지역으로 분화되어 갔는데, 부여·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는 사슴과 관련 언급이 빈출되고 있다고 한다. 백제가 사슴을 희생으로 삼고 ‘부여’ 명칭이 사슴을 나타내는 퉁구스어인 ‘buyu’와 같다는 점은, 백제가 부여계통이 주류였다는 사실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 신라나 마한남부 연맹 등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진한–계림·닭, 마한-매 등 새와 관계있는 언급이 빈출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매’는 백제 계통이 아닌 마한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결국 용맹함을 상징하는 ‘매’가 국호까지 ‘남부여’로 바꾸며 부여족 계승 의식을 강조하였던 백제의 상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매’가 백제의 별호라는 인식은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매’는 백제 아닌, 또 다른 집단을 대변하는 상징동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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