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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유역에 마한을 대표하는 강력한 정치체가 있었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50>마한의 표상(表象), ‘鷹準(응준)’(上)
나주 복암리 고분. 삼국 시대의 나주 복암리는 고대 영산강유역 사회의 중심지로, 대형 고분이 밀집 분포하고 화려한 유물이 다량 출토된 지역이다.

얼마 전, 지난 4월 익산에 있는 백제 무왕의 부부 왕릉이라고 알려져 있는 쌍릉의 대왕릉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이 남성 유골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오자, 그곳에서 180m 떨어져 있는 소왕릉은 왕비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무왕 부부의 무덤이 보다 확실해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서동요는 삼국유사에 실린 무왕의 혼인 설화이다. 동성왕 때 신라와 혼인 동맹한 것을 언급한 것이라는 이병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던 1980년대, 무왕의 혼인과 관련된 사실이라고 당돌하게 주장하였던 필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왕은 출생 설화가 여럿이고, 한미한 출신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 몰락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한 이후, 왕위를 둘러싼 귀족들의 갈등으로 왕권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제어하기 쉬운 인물을 왕으로 옹립하였음을 말해준다.

무왕이 익산에 미륵사를 세우고, 천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무왕의 익산 경영을, 필자는 백제의 마한남부 연맹 세력의 통합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들의 여러 고분들의 묘제양식과 출토 유물들은 그곳의 토착 세력들이 오랫동안 강력한 연맹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영산강식 석실과 함께 옹관이 함께 사용된 복암리 3호 고분은 영산강유역의 옹관묘 조영 세력과 초기 형혈식 석실조영 집단이 같은 계통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두힐’ 등의 목간을 통해서 그리고 이곳이 훗날 대방주 치소였다는 사실에서 다시들 일대가 영산강 중류지역의 거점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 고분에서 금동신발이 출토되고 일본산 금송을 고분조영에 이용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행해진 빈장 및 소·말의 순장과 같은 장제의식 역시 이 지역 정치세력의 강대한 힘을 느끼게 한다. 

백제의 통제를 받지 않은 정치체 

다시들 지역의 연맹세력은 영산강 건너의 시종·반남지역에 있었던 내비리국 등과 함께 마한 남부연맹의 핵심 정치체로서 상호경쟁과 협조를 통해 발전을 거듭하여 갔다.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 마한조의 “(마한인들은) 비록 싸우고 공격하는 일이 있더라도 서로 먼저 굴복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마한남부 연맹의 실상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들이 영산강식 토기나 옹관묘, 영산강식 석실을 공유하며 문화적 동질감을 확립하여 갔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영산강유역의 마한남부 연맹들은 왜, 가야, 백제, 심지어 신라 등과 교류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것처럼 백제의 정치적 지배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적으로도 예속되지 않았다.

복암리 3호분의 96호 석실이 최대 9구, 5호 석실은 4구, 6호 석실은 2구 이상, 7호 석실은 2구의 시신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처럼 한 석실 안에 2인 이상이 안치되어 있는 것은 영산강유역의 다장 풍속과 관련이 있다. 6세기 후반 무렵으로 추정되는 7호 석실의 경우도 착용품인 환두대도 등을 볼 때 피장자 모두 남성이라 생각되어 같은 시기 부부 합장묘의 전통이 나타나는 백제 고분의 특성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이 지역이 백제의 전통과 무관함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발견되었을 때 이미 도굴되어 출토유물도 적은데다, 아파트형 고분으로 유명한 인근 3호분에 밀려 소홀히 취급되었던 복암리 1호분이 주목된다. 다른 고분들이 방대형분 또는 방형분인데 비해 1호분은 원형분이고 2호분과 56m나 떨어져 있는 등 복암리 2∼4호분들과 별도로 조영되어 있다.

말하자면 다른 고분군의 외곽에 조영되어 있어 기존 묘역과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호분은 단독장이라는 점에서 다장인 3호분과 차이가 있고, 봉분 규모 역시 직경 17m, 높이 4.4m로 복암리 고분 가운데 가장 소형급이긴 하나 단독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라 하겠다. 석실의 규모 또한 길이 8.6m로 3호분의 96호, 6호, 7호 석실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이렇게 보면 규모면에서 1호분은 이웃하는 여타 고분들보다 대형급이라 할 수 있다. 1호분의 석실 조영부분이 현실로 들어가는 연도의 중간 부분에 판상석을 돌출시켜 문틀 시설에 배치하고 별도의 전실문을 두어 공간을 구분하는 양식으로 볼 때 3호분보다 늦은 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호분보다 늦게 조영된 3호분 7호 석실에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왜에서 유행한 규두대도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1호분 조영 시점은 이 시기를 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왜와도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복암리 1호분의 독창적인 특성

복암리 고분군에서 비교적 늦게 조영된 1호분의 조영 시기나 형식, 부장품 등에서 백제적 요소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백제의 지배를 받은 구체적 사례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꽤 있다. 그렇지만 복암리 1호분 석실의 구조 중에서 문틀식의 현실문, 장방형에 가까운 현실 평면, 양벽의 조임 흔적, 긴 연도부 등의 특징들은 복암리 고분은 물론 대표적인 영산강식 고분 형태에 속한다.

하지만, 잘 정면된 판석을 사용한 석실 구조 및 단면 4각형의 석실 등은 사비시대 초기 양식과 비슷하다고 생각되고 있고, 특히 전실의 배치와 그 앞에서 이루어진 장례 행위는 같은 시기의 영산강권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내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복암리 1호분만의 독창적인 특징이다.

이렇게 보면 복암리 1호분은 영산강유역에서 뿌리내린 복암리 전통 및 백제 그리고 왜 계통 묘제 등이 결합되어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주며 조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복암리 1호분이 조영되던 6세기 후반,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는 영산강 유역에서, 이처럼 백제의 중앙 묘제와는 다른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조영되고, 재지계 및 백제계, 왜계 등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부장품들이 출토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이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게 한다. 

마한의 독자적인 전통 유지

많은 연구자들은 근초고왕 때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가 5세기에 이르러 백제가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자치권을 부여받은 이른바 간접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성왕 대에 정비된 방-군-성의 지방통치가 이러한 직접지배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가령, 복암리 3호분의 여러 고분에서 발견되는 은제(은화) 관식이 백제의 6품 관원인 나솔에 장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이 백제의 지방통치 체제에 비로소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암리 1호분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복암리 3호분 7호 석실에서는 은제관식이 아닌 금제관식이 발견되었다. 금제관식이 백제의 중앙관료들이 사용했던 은제관식과 다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은제관식을 토대로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지방체제에 편입되었다고 내렸던 결론은 당연히 재고해야 한다.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는?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신분은 복암리 3호분 5호, 16호 피장자들 보다 위계가 높으나 7호 석실의 피장자와는 비슷한 위계라고 생각된다. 가령, 5호 석실에는 4명이 합장되었고, 16호 석실에는 소형화된 석실에도 불구하고 3명이 합장되었으나 7호 석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만 2명만이 석제 두침을 하고 직장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단독장을 하고 있는 복암리 1호분 피장자의 신분이 다른 복암리 고분 피장자들 보다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고 하겠다.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지위를 추정하는데 있어 위에서 언급한 한반도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실 앞에서 장례의식이 행해진 제사공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곳에서 백제의 다른 고분들에서 전혀 발굴되지 않은 녹유탁잔(綠釉托盞)이 출토되었는데, 이 탁잔이 일부러 깨져 있는 것으로 볼 때 분구 조영을 마무리하면서 의식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백제 중앙지역은 마한의 다른 지역에서조차 쉽게 보이지 않은 의식들을 통해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지위가 다시들 지역의 연맹장 수준을 넘어 인근 마한남부 연맹 전체를 아우를 정도의 권력을 지닌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다시들 지역에 있는 연맹체의 구체적인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침 출토 녹유탁잔 바닥에 묵서로 ‘鷹○’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글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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