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노랫말’을 찾아(3)
‘힘 없고 가난한 민초들의 울음소리’
모정산 코짐뱅이 앞에 펼쳐진 갈대밭
1993년 MBC신인가요제 대상작품 거듭나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 집 창가에
길 떠난 소녀 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
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소리
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
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
아아 길 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
쓸쓸한 갈대숲에 숨어 우는 바람소리.


가슴을 적시는 서정성 짙은 가사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 집 창가에…”로 시작되는 ‘숨어 우는 바람소리’는 영암천(덕진천)의 드넓은 갈대밭을 배경으로 한 노래다. 1993년도 김지평 작사, 김민우 작곡, 이정옥 노래로 발표되었으며, MBC 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해 5월 MBC 예술단 제작, 서울음반으로 발매된 ‘숨어 우는 바람소리’는 때마침 컴퓨터가 대중화되고 인터넷 마당이 활짝 열리면서 ‘인터넷 히트송 제1호’가 되었다.

“숨어 우는 바람 소리”는 제목 자체가 여성적 감성을 자극하는 잘 다듬어진 시어(詩語)처럼 고운데다 가수 이정옥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와 가슴을 적시는 서정성(抒情性) 짙은 가사, 특히 갈대숲 우거지는 가을이 오면 중년 주부들이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는 애창곡이다. 이 노래는 사실 노래에 비해 가수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9년 전남 구례(求禮)에서 태어난 이정옥은 80년대 중반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음악의 길에 들어섰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는데 1991년 난영가요제에서 ‘추억은 강물처럼’으로 대상을, 그리고 1993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숨어 우는 바람 소리’로 또 다시 대상을 거머쥐며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두 번이나 대상을 탄 실력파 가수였지만 결혼 후 아쉽게도 대중들의 기억 속에 점점 멀어져 갔다 최근에 ‘이다래’ 라는 예명으로 재기하여 ‘사랑이 남아서’와 ‘사랑노래나 불러보자’ 등을 발표했다. 이후 ‘숨어 우는 바람소리’는 김연숙이 불러 더욱 알려지게 됐고 이정옥 노래보다 김연숙의 노래를 더 좋아하는 팬이 많이 생겼다.

고향 모정산 코짐뱅이의 추억이 담겨

작사가 김지평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덕진면 금강리 금산마을은 야트막한 야산이 있다. 모정산 코짐뱅이가 바로 그것이다. 코짐뱅이는 산의 지형이 소의 코와 같이 비탈진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모정산 코짐뱅이는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갈대밭을 조망하기 딱 좋았다. 멀리 바라보이는 S자형 바닷물 양안으로 뽀얀 갈대꽃이 눈을 간지럽혔다.

특히 가을의 달밤에 바라다보는 갈대밭은 마치 은빛 싸라기눈이 덮인 것처럼 아련했다. 이 노래 ‘숨어 우는 바람소리’에 나오는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는 바로 그런 정다운 모습을 배경으로 삼았다. 그 코짐뱅이에는 주막집이 하나 있었고, 주막집 앞마당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었는데, 어느 해 홍수 때 주막집이 쓸려간 뒤 빈 산모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코짐뱅이는 굽은 소나무들이 어깨동무하며 둘러섰고, 여자 친구와 그 언저리 풀밭에 앉아 있던 어린 작가는 달밤의 갈대밭 풍경에 취해 많은 밀어를 나눴다. 거기에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아기사슴을 키우며 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그러나 약속은 지키지 못했고 그때 바다와 갈대밭은 사라져 더욱 진한 그리움이 되어 작가의 가슴 깊은 곳에 다가왔던 것이다.

민초들에게 위로의 노래로 거듭나

작가 김지평씨는 “예술가의 가슴에 한번 터 잡은 그리움은 어느 때고 작품의 배경으로 살아난다. ‘숨어 우는 바람소리’라는 주제가 잡혀 상당기간 나의 뇌리를 지배하다 1988년 엮은 가사집에 실렸고 그 내용을 개작하여 노래로 내보낸 것은 1993년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울고 싶어도 남이 알까 숨어서 울고, 눈물이 솟아도 남이 볼까 숨어서 닦으며, 고향을 지키며 세상을 살아가는 민초들에게 해줄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만든 것이 바로 이 노래 ‘숨어 우는 바람소리’라고 했다. ‘갈대밭’ ‘통나무집’ ‘달’ ‘사슴’ ‘바람소리’ 그리고 ‘소녀’ ‘그리움’ 등 7가지의 노래 소재는 고향을 지키는 가난한 민초들에게 꼭 돌려드리고 싶은 작가의 선물이었다고 한다. 자연과 함께 하는 민초들의 청빈한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는 메시지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곁들여 소개했다. 1993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대상을 받고 한창 불려 질 무렵, 한 남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은 평소 김지평 선생을 존경해왔고, 김지평 선생이 쓴 노래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뒤 “죄송하지만 ‘숨어 우는 바람소리’가 무슨 뜻이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설명을 다 듣고는 “그러니까 결국 숨어 우는 바람소리는 민중들의 바람 소리군요?”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고쳐 주었다고 했다. “북쪽에서 위선적으로 남용해온 ‘인민’이라는 말이나 남쪽에서 엘리트 의식처럼 남용하는 ‘민중’이라는 말을 다 같이 경계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의 울음소리로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당시 정보 기관원들에게 “민초들이 숨어서 운다”는 게 좋았을 리 없었고, 자신도 마뜩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했다. ‘주부노래교실’과 ‘인터넷 음악사롱’이 붐을 타기 시작하면서 방송이 아닌 곳에서 봄 불처럼 번져나가 애창곡 조사에서 ‘숨어 우는 바람소리’가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김지평 작가는 “바닷물이 막혀버린 고향의 갈대밭이 사라졌지만 나의 가슴에는 그 갈대들의 숨어 우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숨어 우는 민초들의 가슴에 한줄기 위로의 바람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