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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문화와 조상숭배 사상이 결합돼 후장풍습이 형성되다■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48>마한의 ‘후장(厚葬)’ 풍습과 초분(草墳), 옹관묘
3세기 초반 제작된 영암 선황리 출토 옹관은 일상 용기로 사용된 옹의 형태를 지니면서도 널(棺)로 사용된 형식을 띠고 있어 영산강유역에 전용 옹관이 등장하였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초분은 시체를 땅 위에 놓아둔 후 풀을 덮어 무덤의 모양을 만든 것을 말한다. 나주에서는 시체를 나무에 세워 매어 놓거나 나무 위에 얹어 놓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난 주 LPGA사상 최저타 신기록을 세워 세계 여자골프계 역사를 새로 쓴 신북출신 향우자녀 김세영을 보며, “왜 하필 영암 출신일까”라는 자문을 해보았다. 말하자면 마한의 심장 구실을 하며 일찍부터 개방된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 지역의 정체성이 내재화되어 김세영 같은 세계적인 인물이 탄생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지난 주말 월출산 기찬랜드 개장행사에 잠깐 다녀왔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외지인들이 눈에 띄어 보기 좋았다. 아무쪼록 ‘2018영암방문의 해’가 성공리에 이루어지길 기원해 본다.
 
조상숭배 사상과 복장 풍습

유명한 문화 인류학자인 말리노브스키(Malinovsky)는 유족들이 사자(死者)에 대해서 품는 정서 반응에는 사자에 대한 애정과 시체에 대한 공포의 모순된 정서가 병존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모순된 양면적 감정의 균형관계가 다양한 장법(葬法)을 개발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수렵 민족들은 사자에 대한 애석함보다 두려움을 느끼는 반면, 농경민족들은 사후 세계를 믿고 조상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중국 화남지방이나 동남아시아 농경사회에서 사자에 대한 처리과정을 통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공포심이 사라지고 친숙함이 회복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뼈(骨)에 영혼이 깃들어 있어 망자와 후손이 공생한다는 믿음이 생겨 뼈를 깨끗이 하여 자기 근처에 안치하는 전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곧, 유체(遺體)를 ‘파괴’와 ‘보존’의 관념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복장’이라는 장제의식이 나타났다고 하겠다.

우리 고대사회에서 ‘복장’을 행한 것은 사람의 영혼이 사후에 재생하여 그의 신분과 지위를 다시 누린다는 계세사상도 중요한 이유였다. 남녀가 결혼하자마자 수의를 미리 만들어두는 풍습이 있었던 고구려의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하지만 사자와 함께 공존하려는 농경사회의 조상숭배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음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복장제가 동남아시아의 도작문화와 관련이 있으며, 그 중심지역이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이라고 하는 주장은 주목되어도 좋다. 이는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가장 일찍 시작된 나주 다시들 가흥리의 도작문화가 남방계통이라는 점과 관련지어 볼 때 수긍이 간다.

영산강유역의 복장 풍습과 옹관묘

이와 관련하여 매장된 시체를 발굴하고 뼈를 씻어 다시 장례를 치러 뼈를 매장하는 것이 전형적인 복장의 형태이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세골장이나 초분, 심지어 지석묘나 옹관묘가 이에 해당한다는 인류학계 태두 이광규 교수의 지적은 매우 시사적이다. 아시아의 거석기념물 분포가 황하유역의 중원지방이나 시베리아 지역이 아닌 강, 바다, 내 등 물과 가깝고 따뜻한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류를 통한 농경사회 간의 전파로 보았던 이 교수는, 이러한 문화가 전라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고 살폈다.

말하자면 이 지역에 밀집된 지석묘군과 옹관묘군의 분포를 복장제의 흔적으로 주목하였던 것이다. 과거 화산 활동으로 화산석 일종인 응회암이 많이 분포한 보성강유역에서 지석묘가 주된 묘제로 사용된 것과 달리, 그러한 석재를 구하기 어려운 영산강유역에서는 옹관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것이다.

영산강유역의 첫 옹관출토는 1963년 신창동 유적에서였다. BC 1세기에서 AD 1세기 무렵으로 편년된 이 옹관은, 송국리형 토기와 고조선 계통의 명사리식 토기가 결합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 ‘신창동식 옹관’이라고 명명될 정도로 독자적 특성을 지닌 토기였다. 이 옹관이 전용 옹관이 아닌 실생활에서 사용된 점토대토기를 이용하고 있어 본격적인 옹관의 이행기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3세기 초반 제작된 영암 선황리 출토 옹관은 일상 용기로 사용된 옹의 형태를 지니면서도 널(棺)로 사용된 형식을 띠고 있어 영산강유역에 전용 옹관이 등장하였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곧이어 3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대형 전용옹관을 통해 옹관이 매장문화의 주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관이 옹관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용옹관의 출현배경에 대해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거나, 영산강유역에서 추가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시신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대형 일상 용기를 옹관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같은 옹관을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부장품 등 후장 풍습이 있는 영산강유역과 달리, 백제지역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어 백제의 영향보다 영산강 상류지역에 위치한 신창동식 옹관이 발전되면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아울러 시신의 훼손을 막기 위해 옹관을 사용했다는 주장 역시 영산강유역에서 후장으로 나타난 복장제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데서 나온 것이라 본다.

지석묘나 옹관묘는, 사람의 시신을 바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1차장을 한 후 유골만을 추려 장사를 치른 복장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옹관이 복장의 형태로 사용된 것은, 대만 등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시신이 들어가기에는 크기가 작은 독이 관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통해 옹관이 복장 즉 세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영산강유역의 후장 풍습과 옹관묘

게다가 영산강유역의 옹관이 남방 계통의 난생 설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다 그곳에서 많은 부장품들이 출토되고 있어 후장 형태로 발전한 고분 양식이라고 살피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영산강유역의 옹관묘에서 보이는 후장성(厚葬性)은 백제 고분에서는 보이지 않은 이 지역만의 독특한 특질이라는 동신대 이정호 교수의 견해도 있지만, 곧 유력 연맹장들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차별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고분을 적극 조영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영산강유역의 옹관은 남방사회에서 유행하였던 복장이 후장의 형태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러한 복장이 이 지역에서 소, 말의 순장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후장이 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 지역이 농경사회의 전통인 조상 숭배 사상이 뿌리 깊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말해줌과 동시에 이 지역에 세력가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곧 옹관을 통한 복장은 어디까지나 연맹장과 버금가는 세력가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나주 오량동 도요지에서 제작된 옹관을 이용하기 위해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일반 백성들은 쉽게 부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주 정촌리 고분에서 복장을 행하는 주체가 그 지역의 연맹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이러한 추측을 하게 한다. 수서(隋書) 고구려전의 “귀인은 3년간 밖에서 빈을 하고 서민들은 날짜를 점쳐서 매장한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복장이 신분이 높은 세력가에게 해당되는 장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복장이 농경사회의 주요한 장제의식으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일반 서민들에까지 확산되어 갔다고 생각된다.

전라도 지역의 초분과 복장

이와 관련하여 최근까지도 전남지역 도서에 남아 있었던 초분의 존재가 주목된다. 1944년 작고하신 필자의 조부 또한 복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초분은 한반도 남부인 경남, 전남 지방에서 60여 년 전까지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장제였다. 시종 내동리 고분이 있는 곳을 ‘초분골’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남해안 여러지역에 ‘초분골’이라는 지명들이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과거에 이곳에서 초분이 많이 행해졌다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초분은 시체를 땅 위에 그냥 놓아둔 후 그 위에 풀을 덮어 무덤의 모양을 만든 것으로, 위쪽에는 풀을 펼쳐놓고 노끈이나 풀로 엮어 봉분을 만들어 노끈머리는 땅위에 정을 박아 두르고 큰 돌로 눌러 무덤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풀로 덮는다 하여 초분(草墳), 또는 처음 무덤을 쓰기 때문에 초분(初墳)이라고 부르는데, 1년 내지 3년이 지나 새로운 관에 유골을 담아 다른 곳에 매장하기 때문에 ‘복장’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초분은 풀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청도에서처럼 시체를 가마니에 싸서 지면에 놓거나, 나로도에서처럼 밑에 돌담을 쌓고 그 위에 관을 놓고 다시 짚으로 덮는 경우도 있다. 특히 나주지역에서는 시체를 나무에 세워 매어 놓거나 나무 위에 얹어 놓았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산강 유역에서도 이러한 전통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나주지역처럼 나무 위에 올려놓은 것을 가지고 ‘풍장(風葬)’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나 전혀 다르다. 초분은 임시로 장사를 치른 다음 본장을 하지만, 풍장은 그대로 영영 방치하여 놓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무 위에 유체를 걸쳐 놓은 다음 복장을 하는 나주지역의 초분 사례는, 옹관을 이용하는 복장과 비교하여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서민들이 선호하였던 장제 풍습으로 기능하였던 것은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복장은 옥저의 경우처럼 지하에 1차적으로 매장한 다음 꺼내 본장을 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이고 나주에서처럼 대부분 지상에 안치하여 세골장을 겸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남방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복장제가 영산강유역을 포함한 전라도지역에 뿌리내린 것은, 영산강을 통해 남방의 농경문화 유입과 함께 이 지역에 형성된 조상숭배 사상이 결합된 것과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진도 씻김굿처럼 망자의 모형을 만들고 물로 씻기는 행위 또한 이 지역의 복장제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하겠다.                 

글=박해현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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