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47>마한의 ‘후장(厚葬)’ 풍습과 순장(殉葬)

나주 복암리 고분군.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소와 말뼈의 유물들은 장례 치를 때 제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순장용’으로 추정된다. 곧, 마한시대는 소나 말을 장례시 ‘순장’ 대용으로 이용했다. 아래 왼쪽 사진은 소뼈의 형상.

분묘에는 그 의식(儀式)의 수행과정에서 발생한 직접적인 잔존물 또는 상장의례와 관련된 의식의 진행과정과 진행방법 등을 살필 수 있는 흔적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남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자료들이 모여 고대의 상장의례를 복원할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하겠다. 장례의식은 그 사회의 성격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에 해당하므로, 내친 김에 마한 시대 지역의 장례의식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타난 기록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마한은 “장례를 치를 때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 우마(牛馬)를 탈 줄 모르고 장례를 치를 때에만 우마를 쓴다(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라 하였는데, 이는 마한의 장례와 관련된 거의 유일한 기록임에 분명하다. 마한 사람들이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는 이 기록은, 광주 신창동 유적의 출토 수레바퀴 유물을 통해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고 필자가 본란을 통해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어 나오는 ‘장례를 치를 때에만 우마를 쓴다’고 한 표현이 눈길을 끈다. 이 기록을 이제껏 마한에서는 ‘(사람 대신) 소나 말을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순장 풍속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찍부터 여러 기록들에서 확인되었다. 부여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사람이 죽으면 여름철에는 모두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한다. 많을 때는 백 명 가량이나 되어 후히 장례를 치른다.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라고 하는 것을 통해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 풍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옥저에서도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로 모양을 새기기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목각을 순장 대용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동천왕이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이 같이 묻히기를 원하였다는 기록과 다음 왕인 중천왕이 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순장 풍속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 또한 지증왕 3년에 순장을 금하는 조처가 나오는데, 그 이전에는 왕이 죽으면 남녀 각 5인을 순장하는 풍속이 있었다.
 
마한은 장례치를 때 소·말을 썼다
 

이렇게 보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마한은 장례를 치를 때에만 소나 말을 썼다”는 표현은 사람 대신 소와 말을 순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지동이전의 원문의 정확한 뜻은 ‘소·말을 장례 치를 때에만 썼다’라고 하여 순장과 관련한 언급이 없어, 그것이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이용된 것인지, 아니면 순장 대용의 ‘희생(犧牲)’으로 이용하여 같이 봉분에 들어간 것인지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백제는 주로 ‘사슴’을 희생으로 사용하였다는 의견도 있기 때문에 만약 소나 말을 마한에서 그것으로 사용하였다면 두 지역의 문화적 차이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흥미를 끌 가치가 있다.

우리 고대사회에서 소(牛)를 희생으로 삼은 사례는 많다. “전쟁을 하게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牛)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는 부여의 유명한 우제점법(牛蹄占法) 기록을 통해 소를 희생으로 삼았다고 하는 사실과 경북 영일 냉수리비와 울진 봉평 비에 소를 죽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殺牛’ 기록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사실만 놓고 보면 소를 단순히 순장이 아닌 제사의 제물로 삼았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일본 기나이(畿內) 지방을 중심으로 소나 말을 참수하여 봉분에 넣은 형태의 제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여 ‘韓神’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의 사례는 소나 말이 사람 대신 순장 대용으로 봉분에 묻혔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여하튼, 한·일 두 지역의 사례만 놓고 보면, 위지동이전 마한 기록이 단순 제사의 제물로 이용된 것인지, 순장 대용의 희생으로 봉분에 들어간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부안 변산반도에 있는 죽막동 유적에서 사람 모양의 토우와 더불어 ‘토제마(土製馬)’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말을 순장 대용으로 사용하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를테면 마한 지역에서 소·말을 ‘희생(犧牲)’으로 하여 봉분에 넣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당시 마한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중국측 기록에 역사적인 사실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마한의 여러 고분출토 유물에서 소나 말뼈가 당연히 발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장 대용의 소·말뼈가 출토되다

마침 나주 복암리 1호분에서 소뼈 1개체분이, 복암리 3호분에서 말뼈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역사가의 막연한 상상력이 역사적 사실로 구체화될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흥분 그 자체였다. 특히 복암리 2호분의 동쪽 주구에서 소뼈 1개체 분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형태의 동물 뼈가 발견되었고,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4∼5m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말뼈로 추정되는 동물 뼈가 심하게 부식된 채 출토되었다.

일부에서는 출토 뼈들이 당시 폐기물 처리장으로 의심되는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음식으로 먹고 버린 뼈가 아닌가 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으려 했지만, 출토 동물 뼈들이 주구에서 흩어져 있는 제사용 토기들과 함께 나오고 있어 장례의식 때 같이 묻힌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특히 주구 동쪽 부분에서 발굴된 동물 뼈 가운데 소뼈로 추정된 뼈의 경우, 긴 목을 꺾어 동쪽으로 틀어놓았고, 네 다리는 함께 묶어 놓았던 듯 가운데로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다.

말하자면 단순히 제물로 사용하고 버렸다면 여러 동강이로 분리되어 있어야 옳을 것이지만, 이렇듯 1개체가 목까지 꺾어져 있는 상태로 온전하게 발견된 것은 순장용으로 바쳐진 ‘희생’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즉, 복암리 고분의 출토 소와 말뼈 유물들은 장례 치를 때 제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순장용’으로 사용된 ‘희생’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은 마한사회에서 소나 말을 순장 대용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곧, 마한사회에서 소나 말을 장례시 ‘순장’ 대용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순장 풍습은 ‘후장’의 대표적인 사례

이러한 순장 풍습은 전형적인 ‘후장(厚葬)’에 해당하는데, ‘복장’ 즉 ‘빈장’ 또한 ‘후장’ 장례 풍속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부여의 풍속에 장례를 5개월이나 멈추었는데 이를 영화로이 여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장례를 멈추었다’는 의미는, 사람이 죽어 염습을 마쳤지만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곧, 부여에서는 여름에 시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얼음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사람이 죽으면 바로 매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하되 겨우 형체가 덮일 만큼 묻었다가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곽 속에 안치하였다’는 동옥저의 사례와 같이 1차장인 가매장을 한 다음에 본장(本葬), 곧 ‘복장(複葬)’을 한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이러한 복장은, 고구려에서도 확인되고 있지만, 이를 ‘영화롭게 여겼다’는 부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대인들의 ‘후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정촌고분의 피장자는 다시들의 연맹장

중국 최초의 율령인 태시율령(泰始律令)의 상장령에 상복(喪服)이 규정되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일단 실내에 매장하여 일정기간 지난 후 야외로 이장하는 구조, 즉 복장구조를 하고 있는데, 천자는 7일 만에 빈을 한 후 7개월 만에 장사를 치르고, 제후는 5일 만에 빈을 하고 5개월 만에 장사를 치렀으며, 선비는 3일 만에 빈하고 3개월 후에 본장을 치르게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신분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으나 이를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하여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즉, 정촌고분에서 빈장이 최소 7일 이상 행해졌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고분 주인공이 적어도 지역을 대표하는 연맹장이라는 사실을 반영해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