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해원’을 보았다. 이 영화를 제작한 G감독은 인천, 대구 등 전국 학살 피해지 60곳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피해 가족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해원’은 ‘가슴속에 맺혔던 원통한 마음을 풀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제주 4,3사건, 보도연맹 사건, 부역자 학살, 미군 폭격에 의한 학살, 여수·순천사건, 국군 11사단의 빨치산 토벌작전, 거창·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이 일어난 내용들을 생생하게 다루었다.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부역 혐의자들이 집단학살 대상자들이었다. 학살된 민간인만 100만 명이상으로 추정했다.
보도연맹은 초기에 좌익 전향자 중심으로 조직했다가 비료나 토지, 고무신, 쌀을 준다는 말을 믿고 그 단체에 가입한 농민이거나 지역 할당제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강제로 가입된 청년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빨갱이로 몰려 전국적으로 20만 명이 학살당했다지만 훨씬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산·거제에서는 가입자들을 바다에 수장하고, 물 위로 떠오른 사람은 배 위에서 조준 사격해 죽였다고 증언했다. 학살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들은 신원조사와 연좌제, 권력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학살을 목격한 사람들은 평생 폭력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영화 말미에 영암군 금정면 증언 한 토막이 방영되었다. 1950년 12월 16일 목포유달부대와 해병대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차내 마을로 진격하던 중, 마을 어귀에 매복하고 있던 빨치산의 기습을 받아 토벌대를 안내하던 마을주민 J씨(당시 38세·면사무소 근무)와 해병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교전이후 빨치산들은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갔으며 마을 앞산에 진지를 구축한 토벌대들은 3일 동안 대치를 계속하다 ‘피의 학살’을 자행했다. 부대원들이 광분하여 마을사람 모두를 빨갱이, 부역자로 몰아 보이는 즉시 사살했다고 한다. 그들은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며 가옥에 불을 지르고 집안에 남아 있던 주민들을 동네 어귀에 끌어 모아 “니들이 빨갱이를 키워 우리 동료가 죽었다.”며,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게 한 뒤 모두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죽지 않는 어린애가 구덩이에 버려진 엄마의 젖을 물고 밤새 울다 죽어 간 사연은 그 날의 참상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이날 토벌작전으로 마을주민 200여 명과 가옥 38호가 삽시간에 날아갔다고 한다.
삼호읍 피해사례 하나를 더 살펴보면, 영암군 최서단부에 위치한 삼호읍은 목포와 가까워 목포에 상륙한 해군에 의해서 수복작전이 시작되었다. 1950년 10월 3일 목포에 진주한 해군(백부대)은 목포와 부근 일대, 월출산, 국사봉 등 영암지역의 공비소탕을 목적으로 목포경비부를 설치했다.
10월 16일 목포주둔 해군본부는 영암지역 파견대장 S씨와 G씨(삼호면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삼호읍 수복대책회의를 열고 난 후, 목포로 돌아가던 중에 매복해 있던 빨치산에게 S씨가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살해당한 이틀 뒤, 군경합동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 작전에서 주민 70여 명이 솟대봉·중앙촌·소동산·동암 부근에서 그들에게 사살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 외에도 연보리 덤재와 차내동 보도연명 사건으로 100명, 금강리 15명, 농덕리 6명, 지와목 28명, 성재리 40명, 용흥리 10명, 해창 90명, 구림 첫포위 96명, 국사봉 8명, 도갑리 13명, 백암 6명, 한대리 20명, 배바위 12명, 영보리 수백명, 새실 10명, 연보리 10명 등, 전남 총 인명 피해 74,878명 중, 영암군은 12,044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당시의 통계들은 말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2005년부터 2010년 활동을 마칠 때까지 11,175건을 조사했다. 이 가운데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은 전체 73%인 8,206건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국가책임으로 규명된 것은 300여 건에 불과했다. 그 당시 영암군 진실규명을 위한 신청 건수는 영암면 37명, 삼호면 31명, 군서면 15명, 금정면 135명, 학산, 덕진, 도포, 미암 등에서 16명, 총 234명이었다. 그 중 몇 건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민들은 보도연맹, 빨치산, 부역 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수복·토벌작전을 수행하던 해군·해병대와 영암경찰서 소속의 경찰에게 살해된 것으로 규명되어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마저도 이명박정부 이후에는 종료되고 말았다. 이에 유족들은 국회와 정부가 과거사법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키라고 촉구하고 있으나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조차 통과시키지 못하고 계류되어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사건발생 당시가 아무리 전시 수복과정의 혼란한 때였다고 하더라도 군경이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여성(39%)과 어린이(18%), 60세 이상 노인(9%)까지 포함한 가족단위(62%)의 민간인을 무차별 집단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절차원칙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진실을 기억하는 백발의 피해 유족들마저 사라진다면 진실은 영원히 묻히고 말 것이다.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민간인 학살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역사가 존재할 수 없다. 이 문제를 덮어두고 인권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건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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