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면 노송리 송외마을生 전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전 광주 서광초등학교 교장 한국전쟁피해자유족 영암군회장

중학생 때 여름밤이었다. 형들이 모기의 극성도 마다하지 않고 평상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며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우리들은 떠들고 야단이었으나 그들은 도 닦는 사람처럼 심취해 있어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옆에 앉아 그 게임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 시절 형들은 모범 고등학생들이어서 늘 우리들의 부러움 대상이었다. 그 형들이 좋아하는 놀이이니 더욱 관심이 컸다. 제기차기, 자치기, 돈치기, 화투놀이, 공기놀이, 땅뺏기, 팽이치기 등 수많은 놀이들이 있었으나 이 게임인 바둑이 가장 흥미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바둑을 조금씩 익히게 되었다.

그 후, 미암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햇병아리 교사시절 그 동네의 한 선배교사와 매일 밤 바둑대국을 하며 기량을 늘려갔다. 처가가 될 두 번째 발령지인 군서중앙초등학교에서도 바둑 두는 분이 몇 분 계셨는데 금방 친교를 맺고 같이 바둑을 즐겼다. 결혼 전 장인어른과 윗동서가 되실 분과도 대국의 인연이 있었다. 나는 교직 6년째, 모교인 영보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결혼을 했다. 신혼 방에 깨가 쏟아져야 한다는데 우리는 그러지를 못했다. 저녁밥을 먹은 후, 나는 열심히 모실을 갔기 때문이다. “당신은 도대체 저녁마다 무엇을 하러 다니는 것이오?” 내 속사정을 모르는 아내는 늘 불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저녁 내내 바둑대국을 벌인 분은 같은 마을에 사시는 김 선생님이셨다. 나는 저녁마다 그 선생님에게 흑을 시꺼멓게 깔고 바둑기량을 익혔다. 워낙 실력차이가 나서 그 선생님은 재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매일 밤마다 대국자로 상대해 주셨다. 그러기를 5년, 내 실력이 부쩍 늘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서 두지 않으면 자네에게 지겠어.” 그 말씀이 지금도 내 귓전에 생생하다. 고인이 되신 그 분의 가르침이 내 기력에 살아 있다.

“우리 아버지는 참 이상하단 말이야! 저녁마다 친 자식들보다 다정하니?” 자식들은 투덜거렸으나 선생님은 소용이 없으셨다. 대국자는 옆 사람들의 군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국자간의 나이 차이도 상관없다. 그래서 바둑 두는 사람은 ‘마당에 말려놓은 벼가 소낙비에 떠내려가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는 속담이 있나 보다. 그 선생님과 대국을 하지 않으면 저녁밥이 소화되지 않았다. 그 댁을 다녀와야만 내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났다. 자정이 다 되어 신혼 방으로 들어오면 이미 아내는 꿈나라에 가 있었다. 억울하게 패하게 된 날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천장에 마음의 바둑판을 그려 복기(復棋)를 하며 ‘이렇게 두었으면 이겼을 텐데 하면서,’ 잠을 설칠 때도 있었다.

바둑의 기원을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중국 요순시대, 고기서인 박물지에 기원전 2,300년경, 요 임금이 우매한 그의 아들 「단주」를 위해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고 한다. 원래 바둑판의 중심은 역경에서 말하는 태극으로 361호로 가운데 천원(天元) 한 점을 빼면 360호이다. 바둑 4귀는 4계절, 4귀의 화점은 춘분·하지·추분·동지를 상징한다. 서양의 총잡이들이 철저히 신사도를 중시하듯이 바둑에서도 두 대국자간에 정정당당히 겨루는 기도(棋道)를 제일로 삼는다. 비굴하거나 이기려고만 꼼수를 부리면 금방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바둑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하고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아버지와 아들이, 직장 상사와도 마주앉아서 장소를 구애받지 않고 어느 때고 즐길 수 있다. 바둑교육은 인성과 창의력, 사고력, 집중력, 두뇌 계발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요즈음 초등학교 방과후 학교에서도 인기가 높다.

우리 고장 월출산 자락에「국립바둑박물관」이 들어설 전망이다. 2016년 7월 이낙연 당시 전남도지사를 비롯해 각계 전문가 27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물관 건립에 따른 기본계획 및 타당성 조사용역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이 보고회에서는 박물관 건립운영과 앞으로 추진방향 등에 대해 분야별 전문가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전남도는 이번 용역 결과에 따라 영암읍 기찬랜드 안에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2020년까지 약 178억 원을 들여 영암군이 자체적으로 진행 중인 「조훈현 국수기념관」을 포함해 전체 건축면적 5,700㎡ 규모로 건립할 계획이다.

이 박물관에는 바둑의 역사ㆍ문화ㆍ인물을 전시하는 공간과 바둑 배움ㆍ인지과학ㆍ마인드스포츠를 체험하는 공간 등을 갖추게 된다. 박물관은 국내외 각종 바둑대회 개최, 바둑 관련 학교와 바둑 팀 육성 등, 바둑 발전 기본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 또 바둑 관련 유물 전시와 전문인력 확보 등 박물관 발전을 위한 중장기 발전계획 마련, 바둑진흥법 제정(금년 3월 국회 본회의 통과) 지원 활동 등도 적극적으로 전개할 방침이다.

은퇴 후에는 여행이나 다니며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초등학교 두 곳과 시설 한 곳에서 매일 오후면 두 서너 시간씩 90여명의 학생들에게 바둑을 가르칠 수 있는 인연이 주어졌다. 바둑을 한참 배우던 신혼 시절에 구박했었던 일을 회상하며 아내는 “당신의 생에 바둑이 이런 효자덕목이 될 줄을 그 시절에 어찌 알았겠소.” 하면서 오후 출근길에 미소 지으며 행복의 밥상을 차린다. 오늘도 어린 바둑 꿈나무들이 인자했던 선생님으로 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발걸음을 재촉하니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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