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이우스 대표변호사 민변 광주전남지부 지부장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 보상심의위 전라남도 행정심판위원 소청심사위원

우리 헌법 제27조 제4항은‘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라고 하여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범죄사실을 명백히 하여 죄 있는 사람을 빠짐없이 벌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만 보면 범죄의 혐의가 있어 수사대상이 된 피의자나 기소되어 형사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을 범죄인으로 간주하지 말라는 요청은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벌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처럼 죄 없는 사람을 유죄로 오판하는 것은 형사재판에서 배제하여야 할 가장 중대한 해악임은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헌법과 형사소송법 교과서에서 강조되는 이와 같은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라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실제의 형사사건 실무에서 제도적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스스로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구체적으로 필자가 지금까지 15년 동안 변호사로 일하면서 변호한 수많은 사건과 관련하여 유죄의 예단 없이 피고인을 무죄추정의 원리에 충실하게 변호했었는지 되돌아보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서늘함이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변호인인 필자의 선입견 때문에 생긴 부끄러운 경험이다. 변호인이 가지는 선입견의 문제점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던 사건이 있었다.

피고인과 고소인은 모두 65세 정도의 여성이었다. 피고인은 재산적인 분쟁으로 고소인과 말싸움을 벌이던 중 고소인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피고인의 손바닥으로 고소인의 얼굴을 5회 가량 때리고, 고소인의 얼굴에 침을 3회 가량 뱉고 손톱으로 손가락을 할퀴는 폭행을 가하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면서 1시간 동안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려 고소인 운영의 영업장에서 업무를 방해하였다는 공소사실로 기소되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을 변호하면서 필자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수사기록과 관련 증거를 면밀히 읽어보고 검토한 결과 피고인의 유죄를 추정하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고소인의 고소장에서의 피해사실이 구체적으로 현출되어 있고, 피해부위를 촬영한 사진과 목격자의 진술조서까지 합리적으로 제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피고인은 혼자서 억울하다는 취지의 진술만 반복할 뿐 피고인의 변소를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증인이나 증거서류도 제출하지 못한 채 기소된 상태였다.

필자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이 사건을 실형이 선고될 사건도 아니고 벌금형이 예상되는 사소한 사건으로 치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설마 고소인이 자해해서 피해사진을 촬영하고 목격자도 조작하였겠느냐고 피고인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궁하면서 피고인에게 자백하고 선처를 받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취지로 설득하였다.

변호인의 유죄 선입견에 근거한 계속되는 설득에도 피고인은 억울하다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심지어는 너무 억울하다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었다. 필자는 속는 셈치고 피고인이 주장하는 대로 믿어주는 것도 변호인의 역할이라는 의무감에서 변호를 시작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피고인에 대한 그동안의 선입견을 거둬들이고 혹시 무죄선고를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변호인으로서 필자만큼은 피고인을 100% 믿고 최선을 다한 변호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 같다.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목격자가 이 사건 법정에서 이 사건 당시 근무하고 있지 않아 피고인의 범행을 목격한 사실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음에도 수사기관은 목격자가 목격한 것을 전제로 조서가 작성되었고 위 조서가 유력한 증거인 점, 이 사건 당시 실제로 근무했던 직원도 목격자는 당시 근무하지 않았고 직원 본인은 현장에 있었지만 피고인의 범행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변호인의 지적과 같이 고소인이 피고인의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인 폐쇄회로TV(CC TV)의 녹화내용을 지운 이유가 석연치 않은 점 등을 근거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제1심법원의 무죄선고에 대하여 검찰은 아주 이례적으로 항소를 포기하여 피고인에 대한 무죄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필자는 이 사건을 변호하면서 재판의 마지막 순간까지 실제 진실이 무엇인지 두 여인의 상반된 주장 앞에서 적잖이 당황하고 고민한 것이 사실이다. 고소인의 주장이 허위사실이라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피고인이 아니라 피고인을 무고하고 증거를 조작한 고소인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재도 피고인들을 만나고 변호하고 있다. 아마도 변호사 업무를 그만 둘 때까지는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수사기관도 아닌 피의자와 피고인을 변호하는 변호인이 가지는 선입견은 일상적인 변호업무의 익숙함에서 비롯된 기록만 보고 정작 당사자와는 대화를 제대로 하지 않는 매너리즘의 반영이 아닌지 반성해 본다.

사실관계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고 법률가는 법률을 알 뿐이어서 피고인과 충분한 대화를 통하지 않으면 변호인이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와의 대화는 번거롭고 기록을 읽는 것은 편리한 일이니 변호인은 기록을 통해 본 선입견과 예단으로 피고인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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