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림서 낳고 영보에서 자람 전 KBS광주총국 아나운서 부장 전 호남대학교 초빙교수 국제로타리3710지구 사무총장

마침내 봄이다. 꽃을 시샘하는 추위도 있고 춘설이 내리기도 하겠지만 엊그제 춘분이 지났으니 봄을 노래해도 좋겠다. 사방에서 화신이 전해지고 바야흐로 꽃철이 머지않았다.

나들이 하기에 좋은 때이다. 이런 때에 어디를 갈 것인가. 광주 나들이에는 광주 양림동을 찾아보자. 거기 영암이 낳은 서양화가 이강하(李康河)가 기다리고 있다. 남구 3.1만세 운동길, 옛 양림동사무소를 리모델링하여 ‘이강하 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미술관은 2층 규모로 1층은 전시실, 2층에는 자료실과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광주 남구청에서 11억여 원을 들여 꾸몄다. 1년여의 공사 끝에 지난 2월에 문을 열었다.

이 미술관에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이강하 작가가 남긴 400여점의 작품과 유품 134점 등 530여점을 유족이 기증하여 전시하게 되었다.

이강하 작가는 영암읍 동문로 시장 통에서 태어났다.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순수미술학과를 수료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학위 논문 주제는 ‘단청의 회화사적 고찰’이었다.

전라남도 미술전람회 특선과 부문우수상, 전국 대학미전의 특선, 목우회 특선, 한국미술 문화대전 대상, 프랑스 르 살롱전 연 2회 은상 수상이 말해주듯 화려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1985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8차례의 작품 발표 전을 가졌고, 내가 갖고 있는 작품집만도 5권에, 380쪽의 ‘담채 소묘집’(1995)까지 출판했다. 작품집에 게재한 ‘작가의 변’을 보면 회화에 대한 안목이나 의식이 평론가 이상의 경지에 올랐음을 쉽게 느끼게 해준다. 문필가로써도 넘치는 자질(資質)을 갖고 있었다. 그의 빛나는 이면(裏面)이다.

그의 작품집을 보면 그의 주소는 모두가 양림동 100번지이다. 양림동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기에 양림동사무소를 그의 미술관으로 내주었다. 양림동을 사랑한 양림동의 화가였다.

이강하 작가는 56세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을 보면 그는 남이 70세 80세까지 그릴 그림을 미리 그려놓고 세상을 떠난 것 같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선생은 ‘이강하는 재능과 노력과 미적 감수성 그리고 자기 신념을 겸비함으로써 신뢰할 만한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주목 받았다’고 말했다. 치열한 장인적 기질은 진심어린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한다. 극사실적인 묘사기능은 상투적인 찬사를 뛰어 넘는다.

그는 뚝심의 작가였다. 어지간한 집념으로는 감내할 수 없는 집약된 힘이 가중된 그림을 그려냈다. 무섭도록까지 파고드는 리얼리티가 이강하의 그림에는 넘치고 있다. 장석원 교수는 ‘그의 작품에는 샤머니즘적 리얼리즘이랄 수 있는 독특한 화풍이 드러난다. 그러기에 전국적으로 익숙해진 구상계의 상투적 화법이 무시 된다’고 평했다.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일관한 그의 작품에 보내는 찬사라 하겠다.

작가 한승원 선생은 제4회 작품전(1991, 인재미술관) 도록에서 ‘그의 모든 그림에는 길이 있다. 2백호 무등산 그림에서 과수원 그림에 이르기까지 길 없는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길이 보이지 않는 그림에는 감추어진 길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강하 미술관 개관전의 타이틀이 ‘이강하의 길’이 아닐까.

개관전 인사에서도 이정덕 명예관장은 ‘그의 모든 작품에는 길이 있고, 그 길의 시작과 끝에 이강하가 말하고자 했던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와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고인을 만날 수 없지만 광주 남구 이강하 미술관에서 만나는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화가 이강하 그리고 인간 이강하가 살아왔던 길을 되돌아 볼 수 있다. 거기서 뛰어난 작품 세계와 탁월한 예술적 성과를 조망해 보았으면 한다.

이강하를 만나러 광주 양림동으로 가자. 거기에 영암의 작가, 월출산을 사랑한 이강하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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