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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
영암읍 송평리生
법무사
전남인터넷신문 회장

학창시절 인생이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마치 세상의 모든 고민은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것처럼 만사가 복잡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밤이 늦도록 학교 공부가 아닌 문학서적에 매달리는 나의 모습을 보고 아버님은 이따금 불호령을 내리시곤 하셨다.

수험생인 나의 아들이 인터넷이나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에 가슴 졸이다 마침내는 분노의 화산으로 변해가는 동안, 세상을 버리신 아버님의 모습이 순식간에 떠오르고, 역시 사람은 자식을 낳고 키워 보아야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진정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춘기 때 불초한 이 자식은 아버님의 타는 가슴을 외면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인생의 시간여행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우연히 불교성전을 들춰보니 서두에 “일체는 유심조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느니라” 어린 나이에도 대단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친구들에게 일체유심조를 외치고 설법 아닌 설법을 하다보면 상대방은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이 나를 보는지 허공을 보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자,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니 마음을 수련하다 보면 인생의 고난과 역경이 해결될 것이다.

그날부터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 앉아 30여분 아니면 1시간 이상 꼼짝도 하지 않고 두 손을 합장하여 코끝에 대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나만의 방식으로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잦아졌다. 평정을 깨지 않으려 애쓰는 혼돈이 오가는 동안 엉덩이가 저려오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가 해방되는 순간의 쾌감은 역시 고통 뒤에 오는 행복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내 자신에 대한 통제는 더욱 엄격해지고 이후로 어설픈 나의 행보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공부는 아예 뒷전이고 동서양 고금에 있는 모든 서적을 섭렵하려는 듯 여기저기서 구해온 책들과 씨름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체력이 떨어지면 벽에 나란히 박아 논 못에 끈을 달아 그 끝에 집게를 연결하여 책을 옆으로 매달아 놓고 누워서 보았다. 그 자세 한번 기가 막혔을 것이리라.

분명히 한글임에 틀림이 없는데 친구의 여학생 조카로부터 빌린 니이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고 있어도 그 뜻을 알 수가 없고 몇 번이고 앞장으로 다시 가서 돌아와 보아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왕에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나의 성정 때문에 여름철 내내 몸부림을 친 덕에 책갈피가 연탄재를 입힌 것처럼 새까맣게 변하였다. 그러하고도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체는 유심조’에서 악화된 나의 방황은 점점 위험수위에 이르른 것이었다. 그러한 나를 아버님은 오히려 측은하게 생각하셨고 어머님의 안타까운 한숨만 늘어갔던 것이다. 그나마 친구의 조카가 새 책을 빌려주었다가 헌책으로 돌려받은 뒤 하도 기가 막혀 한참을 웃었다고 하니 내가 보아도 한심한 노릇이었다. 인생에 있어 중대한 기로에 서서 나로서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잠들은 깊은 밤 급기야는 “밤이 길어서 눈물이 나오면 차라리 장독대라도 부여잡고 하늘 향해 한바탕 울어재끼고 무조건 가다가 조건으로 가자. 돌아서면 앞이 되어버릴 뒤, 가다보면 뒤가 되어버릴 앞.”이라는 내용의 푸념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일체는 유심조’라는 사상이 그 기저가 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나의 설법의 주된 메뉴는 검은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까맣게 보일 수밖에 없다. 똑같은 보름달 일지라도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보면 서럽게 비쳐지고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가 보면 그야말로 황홀할 것이다. 장미를 꽃부터 살펴보면 예쁜 꽃에 가시가 있어 한없이 아쉽고, 가시부터 보면 험한 가시 속에 핀 꽃이 고마워 한없이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라는 정도였다.

나이를 먹어가고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이따금 갈등을 느끼고 인내의 한계에 이를 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방파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체 유심조’다.

우리나라에서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소말리아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는 수녀님과 흑인 여자조수, 9살된 그녀의 아들에 있어, 라면 한 개는 세 사람의 하루 식량인 것이다. 그러면서 흑인 조수는 “다른 사람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자신은 일할 곳이 있어 좋고 밥을 굶지 않아 좋고 그나마 아들까지 키우니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말한다. 똑같은 라면에다 산술적으로 아홉 배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느낌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 각각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조화가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부자들의 돈 잔치인 별장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주인은 1년에 손님처럼 몇 차례 왔다 가지만 별장지기는 1년 내 그곳에 살고 있다. 그 별장을 매개로 하여 두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만족감의 차이는 지어내는 마음의 변화 때문에 하늘과 땅만큼의 이격도를 보이고 있다. 골퍼와 캐디는 마치 두 사람이 한 몸인 것처럼 똑같은 궤적을 남기며 잔디밭을 누비지만 마음이 짓는 변화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사람에게는 그 궤적이 레저로 비쳐져 즐겁지만 한 사람에게는 일이기 때문에 고역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마음이 짓는 방향에 의하여 인간의 행·불행의 갈림길이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평정을 유지하면서 마음을 잘 지으면 다툼도 번민도 없어질 것이고 나의 아픔과 함께 상대방의 어려움을 감싸려 노력한다면 정겹고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다시금 되새겨 본다.

박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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