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의 한이 서린 흔적을 찾아 -

요즘같이 영하의 추위가 기승을 부리면 나는 동토의 땅 ‘사할린’이 떠오르곤 한다.

1905년 러ㆍ일 전쟁의 승리로 사할린의 절반을 차지한 일제(日帝)는 우리 땅을 통치하던 강점기 시절, 사할린의 석탄을 캐기 위해 일본 기업들을 내세워 강제징용에 나섰다.  

사할린은 일본 홋가이도(北海島)에서 가까워 캐낸 석탄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일본 기업들이 농토를 빼앗긴 우리 농민들을 상대로 “떼돈을 벌 수 있다”며 반 강제적으로 인력을 끌어갔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사할린 강제징용이었다. 나라 잃고, 삶의 터전마저 빼앗겨 방황하던 민족의 한이 서린 흔적을 찾아 사할린을 갔다.
2002년 9월 3일 오후 2시 -.

러시아의 극동지역 사할린(SAKHALINSK)으로 향하는 SAT Airline기(사할린 항공)가 김해공항을 힘차게 발진했다. 승객 200여명을 태운 사할린 항공기는 짙푸른 태백산맥과 동해바다를 발아래 두고, 북으로, 북으로 날았다. 오후 4시 32분 -.

항공기가 사할린 공항에 발을 내렸다. 일제가 우리나라 농민들을 강제징용으로 끌고 가느라 부산→시모노세끼→아오모리→유즈노 사할린스크까지 꼬박 1주일 걸리던 사할린 길을 나는 2시간 30분 만에 갔다.

북위 50도에 걸쳐 있는 사할린은 석탄 등 지하자원은 좀 있으나 계절이 겨울이 대부분이어서 러시아가 오랜 세월동안 유배지로 사용했던 섬이다. 104개 소수 민족 70만 명이 살고 있으나 한국 사람들이 5만 명으로 최다수 민족이란다.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최다수 민족이라니 사할린이 얼마나 살기가 힘든 곳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듯 했다.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긴 계절 탓으로 여름 한철 채소 생산만 가능할 뿐 10월 하순부터 이듬해 5월 하순까지 계속되는 눈 때문에 곡물이 자랄 수가 없단다. 사할린 사람들이 먹고사는 곡물이나 과일 등은 전량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고 했다.

한 겨울에 눈이 올 때는 1m 정도는 보통이고 지붕을 덮는 3~4m의 눈으로 사람들의 통행이 완전히 끊길 때도 많다고 한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겨울철 각 가정에서는 최소한 3~4일 이상 먹을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해 놓아야 한단다.

재래시장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채소와 과일, 김치 등 부식에서부터 연어와 게, 고사리 등 사할린 특산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들이 있었다. 대부분 좌판대를 놓고 서너가지 생필품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었다. 먹음직스럽게 담근 김치를 보고 한국인들을 겨냥하는 상품이냐 물었더니 러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김치를 좋아하면서도 담글 줄을 몰라 한국인들의 가게에서 사다 먹는다는 것이다.

장사하는 한 아주머니에게 사할린으로의 이주과정과 사할린에서의 애환을 들었다. 그는 아버지의 고향이 대구라 했다. 어려서 “돈 많이 벌러 간다”는 부모님을 따라 나섰다가 지금까지 눌러 살고 있다고 했다. 사할린에 와서 온갖 궂은 일 다 하시면서 고생, 고생하시던 부모님들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고향 한번 못가 보시고 돌아가신 것이 한이라 했다.

부모님들은 “일본 놈들이 농토를 다 빼앗아 가는 바람에 먹고 살길을 찾아 돈벌이가 좋다는 말만 믿고 사할린에 왔다”는 말씀을 늘 해오셨다고 했다.“비록 소작농이긴 했지만 그래도 고향에서 농사짓고 친척들과 오손도손 살 때가 행복 했었다”면서 명절 때가 되면 고향 얘기를 하다가 우시더니 끝내는 통곡을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바로 옆에 있는 70대 할머니에게도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해봤다. 그 할머니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상당히 격앙된 표정이었다. “그 땐 일본 사람들이 농지조사를 한다면서 측량이다 뭐다해서 좋은 농토는 다 빼앗아 갔어 -.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 빼앗기고 살 사람이 누가 있어? 돈벌이가 좋다는 말에 돈이라도 벌자고 왔더니 결국 일본 놈들 돈 벌어주는 막노동꾼이 되고 말았어! 여기 사할린에 온 사람들은 그 놈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두 번 피해를 본거야 -.”

외침(外侵)만 900여회를 당하고 끝내는 나라마저 빼앗겨 남부여대(男負女戴), 이리 저리 쫓겨 다니다가 결국엔 강제징용으로 사람이 살수 없어 유배나 보내던 이방인의 땅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그들의 삶을 누가 보상해야 할 것인가?  못난 조국을 만난 운명이라고 쳐버리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사할린 동포들의 삶 앞에 위로해야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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