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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과서에 왕인박사의 도왜 사실 의미를 다루어야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7>한국역사 교과서에 기술된 왕인박사

수록과 탈락이 반복되는 왕인박사 도왜 사실의 심각성 인식해야

역사수업은 주로 교과서를 통해 이루어지고 학생들은 교과서에 의존하여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는 학생들의 역사ㆍ정치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 역사교육을 보면 교육과정의 개편에 따라 어떠한 역사적 사실의 수록과 탈락이 반복되는 등 서술의 관점과 내용이 달라졌다. 그것은 역사 교과가 어느 교과보다 특정한 정치, 사회적 체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진이 남아 있지만 최근 있었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된 논쟁은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 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교육의 현실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왕인박사 도왜 사실이 우리 역사 교과서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필자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살펴볼 기회를 가졌는데, 시대에 따라 수록과 탈락이 반복되고 있을 뿐 아니라 2014 개정 검인정교과서에도 8개 출판사 가운데 3군데 출판사에서 왕인박사 도일 사실이 누락되어 있었다.

구한말, 일제 강점기 민족교육 수단이 되었던 왕인박사

왕인박사에 대한 우리 교과서의 서술은 대한제국 시대에 현채가 쓴《중등교과 동국사략》(1906)에 처음 실려 있다. 이 책은 종래 편년체 사서를 탈피하여 주제ㆍ영역별로 서술하는 방법을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국사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1892년에 하야시가 쓴 《조선사》7권을 현채가 역술(譯述)한 이 책은, 식민사관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따라서 ‘동국사략’은 한국 근대사학사 논의에서 배제되었고 한국 근대사학의 원류를 신채호로 인식하는 경향이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현채가 自序에서 ‘어느 책보다 하야시의 조선사가 일독요연(一讀瞭然)함이 있으나, 외국인에게 자국 역사를 쓰게 함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한탄한데서 알 수 있듯이《조선사》를 그대로 번역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현채가 《동국사략》에서 단군조선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 것이나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을 상술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우리 역사의 유명한 인물들을 서술하는 등 역사적 인물을 강조하여 서술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채는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주어 일본의 고대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서술하였다.

그런데, 현채는 ‘논어를 전한 주체로서 왕인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논어와 더불어 獻上된 대상’으로 분류하여 왕인 도일의 역사적 의의를 낮게 평가한 하야시와는 달리 “박사 왕인으로 하여금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가도록 하니 일본의 문화가 이로부터 시행되었다”라고 하여 일본문화 발전의 주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렇듯 대한 제국기의 근대적 성격의 역사교과서에는 초등, 중등을 막론하고 왕인박사가 도일하여 일본에 문자와 유학을 전하여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적 영웅이나 위인을 부각시켜 나라의 독립을 지키고자 하는 애국계몽기의 애국심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과정에 일본에 우리의 선진문화를 정착시켰던 왕인의 도왜 사실은 충분히 주목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해방이후 민족 주체성 확립과 관련하여 강조된 왕인박사

한편 해방 직후 사실상 첫 역사교과서인 중등용 역사 교과서 ‘조선역사(1946)’는 “왜의 소청을 받아 박사 왕인을 보내어 유학을 가르침에 왜에 그것이 비로소 전함이 되더라”고 기술하였지만, 미군정 문교부에서 발행한 ‘국사교본(1946)’은 일본문화에 끼친 백제의 영향을 강조하였을 뿐 왕인과 아직기 도왜 사실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도왜 사실의 수록 여부가 교과서마다 달랐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1973년에 출판된 검인정 국사 교과서에는 왕인박사 도왜 사실이 한 출판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수록되었는데 5.16 군사정변 후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와 한일국교 정상화이후 달라진 한일 관계를 반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1972년 유신체제 성립 후 국사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1974년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국사 교과가 독립과목이 되고 국정 교과서 체제가 될 때 “백제에서는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에 건너가 유학을 가르쳤고”라고 기술되었다. 일본의 식민지배 아픔을 가졌던 우리에게 일본 고대문화의 기틀을 닦은 왕인 박사의 얘기는 중요하게 다루어졌을 법하다.

2000년대 들어 수록과 탈락이 반복되고 있는 왕인박사

이렇게 30여 년 수록된 내용이 2002년 국정교과서 체제였지만 중학교의 경우 왕인의 도일 사실이 누락되었다가 2011년 검인정 교과서 체제로 바꾸어질 때 다시 기술되었다. 고등학교의 경우는 2011년 검인정 체제로 전환되자 마자 당시 6종 출판사 모두 왕인의 도왜 사실을 누락하였고, 2014년 현재 검인정 교과서 8종 출판사 가운데 5종만 박사의 도일을 기술하였다. 이렇듯 최근에 이르러 국사 교과서에 왕인관련 서술이 수록여부를 걱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김대중 정부 들어 국사 교과가 사회과목으로 통합되고 전근대 부분 서술 분량이 축소된데다, 마침 왕인박사 도일 사실을 부정하려는 국내 학자들의 연구 등이 교과서 집필자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2014년 도일 사실이 다시 수록되었던 것도 전근대사 서술 분량이 늘어난 것이 하나의 이유이겠지만, 독도분쟁, 위안부 문제 등으로 일본과 갈등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문화적 우월 의식을 드러내는 좋은 자료인 왕인 도일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겠다. 이렇게 보면 정치, 사회적인 논란의 중심에 왕인박사가 있는 셈이다.

체계적인 왕인박사 연구와 교과서 내용의 위계화 서술 필요

또 다른 한편으로 교과서의 왕인 관련 서술 자체도 논란의 여지를 제공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1983년도와 2014년도 교과서 서술 내용이 30여 년이 지났지만 대동소이하다. 말하자면 그동안 왕인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교과서 집필자들이 새로운 연구성과를 반영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본역사 교과서처럼 왕인의 후예로 일본 불교 사상계의 거목인 행기 스님과 연계하여 서술하려는 시도는 물론 초·중·고 수준에 맞는 내용의 위계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왕인박사의 공적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7세기 초에 왜에 기악무를 전해준 공주 사람 ‘미마지’ 이야기가 왕인박사를 제치고 교과서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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