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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아닌 영산지중해 출신 왕인박사로 인식체계 전환돼야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6>일본문화의 시조, 영암출신 왕인박사(下)
오사카 난파진가 노래비  왕인박사의 ‘나니와쓰나루터(難波津歌)’ 노래비는 일본 오사카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의 미유키모리(御幸森) 신사에 있다. 시비 옆 안내판에는 ‘왕인박사가 일본 16대 닌토쿠(仁德) 왕이 왕위에 오르니 새 봄이 오고, 매화꽃이 다시 피는 것처럼 새로운 왕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뜻’이라고 한·일 양 국어로 적혀 있다.

영산지중해는 새로운 사상의 호수

왕인박사가 유학과 천자문에 정통했다면 적어도 4세기말 영산 지중해 일대에 유학, 불교 등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좌가 된다. 기원 전후부터 중국과 교역이 이루어졌던 이곳에 유교, 불교와 같은 새로운 사상이 당연히 유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372년 소수림왕 때 불교를 공인하고 유학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백제가 384년 침류왕 때 불교를 공인한 일을 생각하면, 비슷한 시기 영산 지중해 연안에도 이러한 문화들이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은 외부 문화에 대한 수용도가 높은 편이어서 새로운 문화유입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풍요로운 경제기반이 더해진 영산 지중해 일대는 학문이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최초 불교 도래지, 영산지중해

이와 관련하여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한 마라난타가 법성포로 들어와 불갑사와 나주 불회사를 세웠다는 창건설화는 주목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1741년 작성된 ‘불갑사 고적’에 따르면 “불법이 동쪽으로 온 이래 비로소 가람 건축이 있었은 즉 최초의 경영은 신라, 백제 초기인 한(漢)·위(魏)의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되어 있는데서 그 시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를 동국대 김복순 교수는 침류왕이 사망하자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법성포에 왔던 마란난타가 전남의 여러 곳을 다녔던 흔적이라고 하였다. 물론 마라난타가 법성포로 들어왔기 때문에 ‘법성포’라는 포구 명이 형성되었겠지만 필자는 법성포보다는 영산강 하구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마라난타가 영산 지중해 일대를 다니며 포교활동을 한 사실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가 포교활동을 하다 알려져 백제 서울 한성으로 간 것인지, 김복순 교수의 주장처럼 백제 왕실에 먼저 들른 후 귀국길에 영산 지중해 일대에서 포교활동을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곳 영산강유역에 유독 마라난타가 절(寺)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그냥 넘기기에 부담스럽다. 말하자면 이 지역에 새로운 사상들이 일찍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여겨진다.

영산지중해 출신 자리매김 돼야
 

왕인박사의 영정 군서면 왕인박사유적지 내 왕인묘에 봉안된 왕인박사 영정. 일본의 정사 고사기(古事紀)와 일본서기(日本書紀), 속 일본기(續日本紀) 등에 왕인박사의 기록이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왕인박사와 같은 대학자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최근 목간이 발견된 인덕천왕 즉위식에서 왕인이 노래했다는 ‘나니와(難波津の歌)’는 일본 최초의 정형시인 ‘와카(和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왕인박사가 ‘書’·‘文’ 성씨의 시조라는 점과 그 후예들이 “대대로 직업을 계승하여 사관이 되거나 박사가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대학자의 풍모를 느끼게 된다. 게다가 그 후예들이 일본고대 불교사상 형성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는 井上光貞의 논증은 왕인박사의 역사적 위치를 새삼 깨닫게 한다. 따라서 도래인이었지만 일본 역사서 및 교과서에 그의 활동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사기’, ‘속일본기’, ‘일본서기’ 등 일본사서에 왕인박사가 ‘마한인’이 아닌 ‘백제인’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서들이 편찬된 8세기에는 마한이 백제에 편입된 지 이백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왕인의 출자가 백제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역사서는 물론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왕인박사가 영산지중해 지역출신 마한인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한·일 양국에서 추앙받다

이렇듯 일본 사상계의 시조가 된 왕인의 활동은 일본 최초 역사서인 ‘고사기(712)’, 최초 관찬사서 ‘일본서기(720)’ 등 8∼9세기에 편찬된 수많은 전적들에서 확인된다. 그후 주자학이 본격 도입된 에도시대에 백과사전인 ‘왜한삼재도회(倭漢三才圖會1712)’와 왕인박사가 포함된 성현들을 그린 ‘前賢故實’(에도시대 말1818∼메이지 초1868) 등 왕인을 언급한 문헌이 많이 나타났다. 그가 유학의 개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때 신숙주가 일본에 다녀와 쓴 ‘해동제국기’에 왕인이라는 인물 언급 없이 백제에서 서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자연인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 무렵, 통역관으로 왔던 일본 승려 현소가 조선인 김광에게 보낸 편지에 “응신천왕 때 백제국에 박사를 구하여 경사를 전수하니 귀천이 없이 중국 글을 익혔다”고 하여 ‘박사’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왕인에 대한 정보가 조선에 처음 알려지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남용익과 신유한의 견문록 등에 왕인의 도일 사실이 간단히 언급되고 있다.

천자문을 왕인이 전했다고 처음으로 언급한 실학자 이덕무는 왕인을 ‘일본유학의 시조’, ‘일본 시문의 시초’라고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쓴 이규경도 중국인 서복이 일본에 전했다고 하는 경서는 백제가 전한 것이 옳다고 나름의 해석을 하며 “왕인에 의해 유교가 비로소 행하게 되었다”는 나름의 주장을 덧붙였다.

특히 ‘해동역사’에서 왕인을 별도의 항목으로 만들어 상술(詳述)한 한치윤은 “일본의 유종(儒宗)이었다”고 하였다. 추사 김정희도 완당집에서 왕인박사를 다루는 등 실학 시대에 왕인 도왜 사실이 부쩍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 같다. 말하자면 국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보면 왕인박사 전승이 내선일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주장은 더 이상 입론의 근거가 없다고 하겠다.
 
일본 고대문화 탄생에 기여하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이후부터 1910년 국권 피탈 무렵까지 두드러져, 일본의 문화 기원이 한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중심에 왕인박사가 있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애국계몽기 지식인들은 왕인박사를 통해 민족의 자존감을 고취하려 했다고 생각된다.

반면 일본인들은 고종황제의 아들 영친왕이 1908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두 학이 손을 잡으니 한 집과 같구나. 뜰의 매화가 기쁨을 드리니 하얀 봄꽃을 피우네. 천년의 우정(隣好)을 기록할지니, 이는 왕인이 옛적에 읊었던 꽃이라네”라고 하며 한일병합에 왕인박사를 이용하려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3·1운동 후 일본이 식민지 정책을 문화 통치로 바꾸고, 1937년 중일 전쟁 후 내선일체 정책을 추진할 때 본격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1932년 영산포 본원사 주지인 일본승려 청목혜승이 왕인박사 동상건립을 추진하면서 “왕인 박사는 원래 타국의 신하로 훌륭함이 이와 같고 지금은 일선일가(日鮮一家)가 되었으니(중략) 박사의 옛 땅인 영암군 구림의 유적은(중략)나는 박사의 동상을 세워 국민 보초의 성의를 다하고자 한다”라고 하는데서 왕인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확실히 보인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8년 오사카에 왕인신사를 세우고, 1940년 도쿄 우에노 공원에 왕인박사비를 건립하는 등 일련의 왕인 현창사업들이 일제의 내선일체 선전도구로 추진되었다. 누차 강조하였지만 왕인박사가 도왜하여 일본문화 발전에 끼친 공적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한 채 일본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하여 도왜 사실을 부정하고 평가 자체를 거부하려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음 호에서는 한·일 양국 역사 교과서의 왕인박사 서술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박 해 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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