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5>일본문화의 시조, 영암출신 왕인박사(中)

일본 시가현 오스시(大津市) 와니촌(和邇村)의 왕인신사. 이 마을에는 '和邇(わに)'라는 성씨를 가진 주민들이 살고 있다.

도왜와 영암출신설 역사적 사실

지난 호에 천자문이 6세기 초 중국 양나라 주흥사가 편찬하였기 때문에 왕인박사가 5세기 전후한 시기에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일부의 주장을 비판한 바 있다. 동시에 ‘왕인’ 박사의 얘기는 일본에서 왕인 박사보다 적어도 1세기 후에 일본에 왔던 같은 도래인 ‘왕진이’의 도왜 사실을 윤색한 것이라는 의견도 잘못된 견해임을 입증하였다. 사실 고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당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기본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차 모두 몇 백 년 지나 고려시대에 편찬된 사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데 금석문을 비롯하여 고고학적인 유물 등이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9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 ‘신찬성씨록’을 보면 하내(가와찌) 지역에 도래인 씨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공광구소호’ ‘조족문 토기’ ‘승석문토기’와 같은 대표적인 영산강식 토기들이 하내 지역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는 것과 연관지어 보면, 그곳 도래인들  상당수가 영산 지중해 출신이었다고 생각된다. 왕인박사가 ‘하내 문수씨(文首氏)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왕인과 그 후예들이 가와찌 지역에 많이 정착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보면 왕인박사는 가와찌 지역에 있는 영산 지중해 출신 도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를테면 왕인박사가 영산 지중해 출신일 가능성이 높고, 나아가 왕인박사의 도왜 사실이 명백히 역사적으로 입증된다고 하겠다.
 
도왜 사실을 입증해주는 고토열도
 

일본 큐슈 고토(五島) 열도에서 출토된 유공광구소호. 이 유물은 전형적인 영산강식으로 시종 만수리 4호분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왕인박사 도왜 사실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영산 지중해 사람들은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한반도 서남부-가야ㆍ왜ㆍ대마도ㆍ오끼섬 항로를 거의 이용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대마도나 오끼 섬에서 지석묘와 같은 한반도계 유물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반면 큐슈지역의 고토(五島) 열도에서는 지석묘가 다수 발견되고 전형적인 영산강식 유공광구소호까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일본 큐슈 서북단의 장기현 서쪽 해상에 위치한 고도열도는, 복강도(福江島)ㆍ구하도(久賀島)ㆍ나류도(奈留島)ㆍ약송도(若松島)ㆍ중통도(中通島) 등 5개의 큰 섬 및 그 외 약 140개의 유ㆍ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지정학적으로 고토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중국대륙으로의 해상교통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며, 왜구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런데 1940년대 그 열도의 한 섬인 중통도 유적지에서 유공광구소호가 출토되어 현재 그곳 경빈관(鯨賓館)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국의 유공광구소호는 충남 이남의 마한권, 가야권, 신라권에서 모두 출토되지만 영산강 유역이 중심지이고 전북 고창 지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토열도 유공광구소호는 시종 만수리 4호분, 광주 향등 3호 주거지 등 5세기 전반기 그것과 상통하는 것으로 영산강 유역에서 제작된 것이 분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이 토기를 통해 당시 고토열도와 영산강 유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이 당시 영산 지중해 지역과 왜의 규슈지역을 연결하는 중간거점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말하자면 영산 지중해-고흥반도ㆍ여수 금오도ㆍ고토열도ㆍ아리아께 해를 거치는 항로가 두 지역을 연결하는 항로였다고 믿어진다. 게다가 고도 열도에 현재도 남아 있는 ‘와니가와(鰐川)’ ‘기슈쿠쵸(鬼宿町)’ ‘오니다께(鬼岳)’와 같은 지명은 왕인박사와 절대적으로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학술원 회원 박광순 교수님의 교시는 이러한 추론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말하자면 왕인박사 일행이 이 항로를 이용하여 왜로 건너갔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결론적으로 왕인박사 도왜 사실은 이러한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따라서 더 이상 도왜 사실 여부가 논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선일체의 주장은 잘못됐다

한편 왕인박사의 출신지가 영암 구림이고, 인근 상대포 항구에서 왜로 건너갔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일제 강점기인 1939년 이병연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서 “성기동은 군서 이십리에 있고, 백제 고이왕 때 박사 왕인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라고 영암 출생설을 언급한 것을 근거로 얘기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 책이 왕인박사의 영암 출생설을 언급한 최초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근래의 기록인 까닭에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이병연의 이러한 주장이 그보다 앞서 영산포 본원사(本願寺) 주지였던 아오끼(靑木惠昇)가 영암에 왕인박사 동상 건립 운동을 시작한 데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물론 동상 건립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아오끼가 박사 왕인 동상건립 취지문에서 “영암 구림에는 기록은 없지만 구전되기로는 배를 타고 떠난 석별의 자리와 옷을 벗어두고 간 바위가 있다. 이곳에 1만 엔의 기금으로 동상을 세우려 한다”라고 한 것을 참고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선일체를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일제 강점기에 일본 승려에 의해 왕인박사의 영암 출신설이 만들어졌고 이를 이병연이 이어 받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국내 학자들이 왕인박사 도왜 사실이 내선일체를 추진하려는 일제가 조작한 결과물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암이 아닌 부여를 왕인박사 출생지로 비정하여 현창사업을 추진하였던 일제 강점기에 공주 출신 이병연이 굳이 영암 출신설을 주장하였던 아오끼의 주장을 답습할 이유가 없다. 이를테면 아오끼나 이병연 모두 영암 구림 일대에 퍼져 있는 전승들을 정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왕인의 영암 구림 출생설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려는 일제의 날조된 주장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하겠다.
 
도왜 전승설화는 역사적 사실 입증

아마도 아오끼, 이병연 등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영암군 월출산조에 실린 고려 명종 때 유명한 학자 김극기의 시가 왕인박사의 영암 출신설을 주장하였던 현존하는 가장 오랜 자료가 아닐까 싶다. 즉, “상사께서 가시고 어디에 머무는지 묘연한데 표표한 유풍은 천고의 세월동안 남아 있네. 상사께서 지난 날 홀로 머무를 뜻이 있어 소나무 아래 석문에서 날로 거처하셨네. (중략) 이옹이 홀연히 나를 찾아왔네. 늙은 백발이 쭈글쭈글한 노인이로다”라는 내용인데, ‘상사’, ‘이옹’ 등은 아무래도 왕인박사를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월출산에 유람왔던 김극기가 그곳에 전해지고 있던 왕인의 구전을 듣고 일대기를 회상한 것이라 생각된다. 고려 중기까지도 영암지역에는 왕인박사의 도왜와 관련된 설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설화가 어떤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라 할 때 그냥 넘겨버릴 수만은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이 전승설화는 왕인박사가 영암지역에서 도왜하였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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