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3>한·일 교류의 상징, 시종 태간리 전방후원형 고분(下)

시종 신연리 고분

역사적 실체 파악이 중요하다

우리 영암 출신으로 도일하여 일본 고대 사상계의 비조(鼻祖)가 된 왕인박사에 대해 학계일부에서는 왕인 도일 전승이 일제 강점기 내선일체 이데올로기 현창사업 과정에 적합하였고, 해방이후 주체성 교육의 일환으로 현창되다가 이제는 특정지역의 문화적 기획상품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평가절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가 누차 강조하는 이야기이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려는 노력 없이 단순히 ‘축제’의 주인공으로 연례행사의 하나로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사례라 하겠다.

4세기 후반에 조영된 태간리 고분

앞서 태간리 전방후원형 고분의 조영 시기에 대해 4세기 설 또는 6세기 설 등으로 논란이 있었음을 언급한 바 있는데, 최근에는 6세기 조영설이 보다 유력해진 느낌이다. 하지만 긴끼 일대에 형성된 영산강식 토기와 왕인박사의 도왜 시기 등을 놓고 보면 두 지역의 교류가 활발한 4세기 후반 이미 전방후원형 고분의 존재를 영산강유역 정치 세력들이 충분히 알고 있었을 법하다. 이러한 점에서 영산강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이 긴끼지역 고분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는 서현주 교수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나아가 이미 4세기에 긴끼지역에 진출한 영산강유역 이주민들을 통해 일본의 전방후원분이 본국에 소개되었을 것이라는 부산대 신경철 교수의 지적을 고려한다면, 태간리 고분을 처음 발굴조사한 강인구 교수의 견해처럼 4세기 조영설이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6세기로 넘어가면 영산강유역은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남하하는 백제 세력에 밀려 세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재지 세력들이 거대한 전방후원형 고분을 축조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영산강유역 정치세력들이 조영한 고분

한편 금동관이 출토된 대형 옹관고분인 나주 신촌리 9호분은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찾으려는 일제가 1917년부터 2년간 발굴을 하였으나 그들이 원하는 흔적을 찾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다 1999년 추가 발굴과정에서 원통형 토기인 하니와가 출토되었을 때 그 무렵 확인된 다른 지역의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 고분과 관련하여 일본학계에서 흥분을 하였을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하니와는 왜계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제작된 재지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라고 학계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하니와가 광주 월계동의 전방후원형 고분에서도 출토되고 있고, 나주 복암리 대형옹관 고분군에도 역시 월계동 전방후원분과 같은 형태의 석실이 조영되는 것으로 보아 전방후원형 고분의 조영이 재지 토착세력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서현주 교수의 언급처럼, 처음에는 1, 2기씩 분포하고 있었지만 점차 인근지역에 대형 고분들이 조영되고 있어서 조영세력이 정주화, 재지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점, 전방후원형 고분의 분포지역이 상당히 넓게 형성되어 있는 점에서 왜에서 파견된 관리가 아닌 재지 토착 세력들이 조영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부분 전방후원형 고분이 영산강유역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은 점도 영산강유역 연맹체의 수장들과 깊은 관련이 깊다고 여겨진다.
 
지역 정치 세력들의 힘 과시

앞서 영산 지중해를 장악한 ‘내비리국’은 6세기에 백제에 편입될 때까지 강한 재지 토착성을 유지하며 커다란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은 그러한 힘을 반영한 것이라고 살핀 바 있다. 그리고 비슷한 규모의 대형 옹관고분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데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내비리국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지적한 바 있다. 일본에서 3세기에 처음 전방후원분이 조영될 때 다른 호족 세력들을 통합하여 최초의 중앙 집권국가를 이룬 히미코 여왕이 그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처럼 일본의 거대 전방후원분들이 조영되어 있는 百舌鳥·古市고분군이 중국과 조선 반도에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것도 외국 사신들에게 그들 왕조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왜 왕조의 의도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말하자면 영산강유역의 거대 전방후원형 고분도 현지 토착세력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껏 전방후원형 고분을 토착세력이 조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연구자들의 주된 근거가 이러한 고분을 축조할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5세기까지 영산 지중해를 중심으로 강력한 연맹체를 구축했던 '침미다례', '내비리국' 등의 국력은 이러한 고분을 조영할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독자적 성격의 구조와 부장품들

결국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은, 원분 형태로는 거대 고분을 조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지역 정치세력들이 거대 고분 형태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음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외형적으로 왜와 비슷하다고 하나 독자적인 내부석실 양식을 채택하고, 분주 토기 또한 재지적인 성격이 확실히 드러난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이 지역의 문화역량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긴끼의 수에키 토기를 대부분 부장품으로 사용하였지만, 영산강유역의 부장 토기들은 대부분 영산강 유역산으로 일본 열도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였던 신경철 교수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비록 일본의 것을 '모델'로 하였더라도 일본의 전방후원분의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독자 세계를 구축하였다라고 언급한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따라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백제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영산강유역 정치세력들이 왜와 연합하는 과정에서 채택된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거니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 학자들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마한 남부 연맹의 실체 확인

여하튼 거대한 전방후원형 고분을 조영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과시한 재지 세력들이 영산강 여러 곳에 있었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이들이 비슷한 형태의 전방후원형 고분을 조영한 것은 같은 마한 남부 연맹체였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영산강유역에는 거대한 전방후원형 고분 이외에도 영암 옥야리, 신연리 고분군, 나주 반남 고분군의 거대한 고분들이 수없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거대 고분들은 이 지역의 독자적 정치체를 설명하는 주요한 논거라고 하겠다. 일부에서 고분의 크기만 가지고 정치세력의 규모를 언급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거대 고분을 조영한 사실은 영산강유역 정치체들의 강력한 힘의 반영임에 분명하다. 다만 그 전방후원분들의 규모의 차이가 크지 않은 것은 이들 지역의 정치 세력 차이가 대동소이함을 보여준다고 본다.

이처럼 비슷한 세력이 분산되어 있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를 결성하는 데 한계로 작용했을 법하다. 요컨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들은 이들 지역이 마한 남부 연맹체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임과 동시에 아직도 독자적 정치체들이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분산되어 느슨한 단계의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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