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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방후원분은 영산강유역 이주민들의 작품이다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1>한·일교류의 상징, 시종 태간리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고분(上)
시종 태간리 자라봉 고분. 앞부분은 방형이고 뒷부분은 원형으로 이루어진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4세기 후반 일본 오사카 지역 대형고분과 비슷하다.

태간리 고분과 일본 전방후원분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리 영암 시종면 태간리 입석 마을에 길이 36m가량의 ‘자라봉’ ‘자라뫼’ ‘조산’이라 부르는 작은 동산으로 알았던 커다란 고분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형태가 자라 모양이었기 때문에 ‘자라봉’이라고 불러왔던 것 같다. 해남 월송리 고분에서도 사용된 ‘조산(造山)’ 명칭이 사용된 것은 자라봉 고분이 자연 지형이 아니라 인공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이 동산을 1991년 발굴 조사를 해보니 앞부분은 방형이고 뒷부분은 원형으로 이루어져 마치 일본에서 3세기 고분 시대에 출현한 이래 4세기 후반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고분으로 발전하였던 전방후원분이 연상되었다.

일본 각지의 연맹 수장들을 복속시켜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인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을 열었던 히미코 여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하사하카 고분이 이른바 ‘고훈시대 전기’를 열었던 대형 전방후원분의 시초이다. 가와찌 일대에 길이 486m에 달하는 ‘大王墓’라고 불리는 大仙陵을 비롯하여 거대한 전방후원분들이 마치 경주 대릉원처럼 百舌鳥·古市고분군에 100여 기 이상 밀집되어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과 장고분, 어느 명칭이 좋을까?

이러한 고분들이 1980년대 들어 영산강 유역에서 10여 기가 발견되어 그 성격 및 명칭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가령, 모양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흡사하기 때문에 ‘전방후원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견해,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의 정치체계를 상징하는 의미로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명칭을 쓰게 되면 영산강 유역과 왜 왕권이 관계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전방후원형 고분’이 옳다는 견해, 외형은 전방후원분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장고산’이라는 지명 및 장고와 닮았기 때문에 ‘장고분’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월계동 고분 등에서 출토된 분주 토기 등이 왜에서 나온 ‘하니와’와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일본의 전방후원분하고 같은 성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지만 왜 왕권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갖지 않은 채 독자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전방후원형 고분’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최근 학계에서도 ‘전방후원형 고분’이라는 용어 사용이 보다 바람직스럽다는 의견이 많다. 광주·전남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장고분’이라는 용어가 학계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영산강 유역에 대형 고분이 집중된 까닭은?

 

시종 태간리 고분만 하더라도 길이가 37m에 달하고, 해남 용두리 고분과 함평 장고산 고분은 길이가 무려 각각 77m, 70m에 달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 확인된 것만도 13여 기에 달하는 전방후원형 고분이 영산강 유역 주변에 분포되어 있다. 전방후원분의 전방부 형태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방형에 가깝고 후원부보다 전방부의 높이가 낮은 신덕1호분·자라봉 고분·용두리 고분 유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삼각형에 가깝게 전단면(前端面)이 넓고 후원부와 비슷한 높이인 표산1호분·명화동고분·장고산고분·(영광)월계1호분·(광주)월계동1·2호분이 있다.

이 고분들은 영광 월계고분과 함평 표산1호분을 제외하고 대부분 발굴 혹은 시굴 조사되었는데, 외형과 내부구조로 볼 때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는 시기적인 추이로 파악되고 있다.

필자는 (사)왕인박사현창협회의 후원으로 2013년 일본의 오사카 남부의 古市古墳群과 百舌鳥古墳群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한 대형 고분들이 광주 월계동, 해남 반도 등 영산강 유역 여러 곳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필자가 그때 가졌던 양 지역의 문물교류 및 정치세력의 실체를 파악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오래도록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한남부 연맹체와 왜’ 관계로 한·일 고대사 인식전환 필요

고대 일본의 문화 발달에 백제가 기여했다는 것은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통설화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출토 한반도계 유물들을 분석한 경북대 박천수 교수는, 3세기부터 5세기까지 일본 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의 중심은 가야이고, 백제와의 교류는 6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필자 또한 당시 백제와 왜가 매우 긴밀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마한 남부 연맹을 이끌었던 ‘침미다례’와 ‘내비리국’ 등이 반도 서남부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제가 서남해 연안항로를 통해 왜와 자유롭게 교류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별도로 다룰 예정이지만, 당시 백제는 남원-섬진강 루트를 통하여 왜로 연결하고 있었다. 4세기 후반에 전남 남해안 일대가 백제의 지배에 들어갔다는 기존 인식과 달리 5세기까지도 이 지역 연맹왕국들이 마한 남부 연맹을 형성하며 독립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백제와 왜’가 아닌 ‘마한 남부 연맹체와 왜’ 로 바꾸어 생각을 해야 한다.

전방후원형 고분 피장자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들

이 고분들의 조영 시기를 대체로 5세기 후반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태간리 고분의 경우는 5세기 초기에 조영되었다는 주장도 일부 있다. 이 고분들을 누가, 왜 조영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하다. 이 고분들의 조영 집단의 성격에 대해 일본이 파견한 왜인설, 백제가 파견한 왜인설, 일본으로 건너간 마한계 후예들 가운데 영산강 유역으로 망명한 귀향설, 재지 세력설 등 의견이 다양하다. 말하자면 아직 어떤 결론이 나와 있지 않은 실정이다.

왜인 파견설은, 영산강 유역과 왜 사이에 교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왜인을 파견하였다는 것으로, 영산지중해상의 남해만 일대 등 주요 항구가 밀집한 곳에 있지 않고 산발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까닭이 설명되지 않는다. 백제가 파견한 왜인설은, 웅진 천도 후에 영산강 유역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력이 떨어지자 이 지역의 토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왜계 백제 관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왜계 백제 관료라면 당연히 영산지중해의 중심지에서 활동하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산강 외곽지역에 단독분 위주로 산발적으로 조영된 점, 특히 영산강 유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면 핵심 지역을 방치한 채 외곽지역에 위치하였을까 라는 의문에 봉착한다. 마한계 귀향설은 원래 영산강 유역에 장고분과 대형 옹관묘를 축조한 세력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전자가 큐슈지역으로 이주했다가 귀향하며 조영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주장 또한 일본 현지에 이주한 마한인들이 장고분을 묘제로 채택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어떻게 200여 년 넘게 일본사회에 동화되지 않은 채 귀향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재지 수장설은 영산강 외곽지역에 산재되어 있던 토착 세력들이 남하하는 백제의 압박을 이겨내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조영했다는 것이다.

이 설은 5세기 후반 특정 공간에 배치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재지 토착세력과 관련성이 없고, 이 지역에서 대형고분을 조영할 정치세력의 역량도 없었다고 비판되고 있다. 결국 전방후원분의 피장자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제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영산 지중해 정치세력들이 조영한 대형 고분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원부에 비해 방부가 발달한 길이 400m이상의 거대 고분이 100여 기 이상이 조영되어 있는 오사카 남부의 古市古墳群과 百舌鳥古墳群에 있는 고분과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서현주 교수의 지적은 시사적이다.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이 近畿(긴끼)지역 고분들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는 것은, 누차 강조하였듯이 그곳에서 출토된 토기 등 유물들이 영산강 유역 계통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두 지역의 활발한 교류의 산물이라 여겨진다.

부산대 신경철 교수가 이미 4세기에 긴끼 지역에 진출한 영산강 유역 이주민들을 통해 전방후원분이 본국에 소개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듯이, 왜와 교류 과정에서 전방후원분이 연맹왕국 수장의 무덤임을 알게 된 영산강 유역의 재지 세력들 가운데 일부가 이 묘제를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전방후원분은 대형 옹관 고분을 조영한 경험을 가진 영산강 유역의 재지 세력들이 채택한 것이라 하겠다.

박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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