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10>영산 지중해와 국제 무역항, 상대포

상대포와 구림마을 일대 <사진제공 영암문화원>

커다란 군세를 자랑했던 영암 

지난 호에 통일신라 경덕왕 때 현 영암군의 지명이 나오게 된 과정을 실증하여 보았다. 영암이 고향이 아닌 필자에게 영암은 우리 지역에서 규모가 작은 고을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막상 보니 600㎢가 넘는 큰 지역이었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암군조에는 영암군의 위치에 대해 동쪽으로는 나주 경계와 14리, 북쪽으로는 나주 경계와 30리, 남쪽으로는 강진현 경계와 17리, 해남현 경계와 75리, 서쪽으로는 해안이 50리, 경도 즉 한양과는 822리 떨어져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노도, 달목도, 보길도, 횡간도 등 영속된 섬 이름이 24개나 영암군조에 기록되어 있어 영산 지중해에 연해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신기하게 비칠 수 있다. 이 섬들 가운데는 우리가 익히 아는 보길도와 횡간도 등 현재 완도군에 속한 섬도 보인다. 적어도 조선초기 영암군은 남해안에 있는 대부분 섬들을 직접 관할하고, 인근 해남현, 강진현도 예하에 둘 정도로 커다란 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백제 때 ‘월나군’이라 하여 군단위 행정구역이 있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역시 명칭만 ‘영암군’으로 바꾸어졌을 뿐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미뤄 마한 이래 강성한 정치세력이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본다. 반면 인근 반남지역이 세력 중심지였던 마한남부 연맹 대국 ‘내비리국’은, 백제에 끝까지 저항하다 절단 냈다는 의미를 가진 ‘반내부리’ 현으로 모멸감을 느끼는 행정명칭과 군보다 규모가 작은 현으로 격이 떨어뜨리는 수모를 겪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비로소 반남군으로 승격되는 과정을 거쳤다. 말하자면 옛 내비리국과 일난국 두 연맹왕국이 있었던 곳에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말한 ‘대국’ 규모의 행정구역이 각기 설치된 것은 마한시대에 그곳 연맹왕국의 정치적 힘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준다. 누차 이야기 했지만 10여기가 훨씬 넘는 신연리 고분군처럼 시종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거대 고분군들은 마한시대 영암지역의 정치적 위상을 확인해준다. 이러한 정치ㆍ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기에 비록 영암지역 연맹왕국이 훗날 백제에 복속되었다 하더라도 그 세력을 온존하게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옥한 농토,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

 

월출산 제사 유적 출토 유물

필자가 전라도 고대사를 집필하고 있는 관계로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지역 자연환경을 유심히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상황은 인문환경과 자연환경이 어울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원고를 쓰는데 착상을 얻고자 월출산에 올라 영산 지중해 일대를 조망할 때마다 장대한 힘을 과시했을 마한 연맹왕국 모습을 그려본다. 지금은 비옥한 농토로 변했지만, 그 옛날 영산 지중해의 중요 국제 무역항이었던 ‘상대포’는 왜를 향해 눈물을 글썽이며 떠났을 왕인박사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암지역은 영산 지중해의 하구에 위치하여 낙랑, 백제, 가야, 왜 등과 활발히 교류가 이루어져 새로운 문화 접촉이 용이하여 발전 속도가 빨랐다. 게다가 심한 영산강하구 조수 차로 퇴적물이 쌓인 간석지에 형성된 비옥한 농토는 다른 연맹왕국들보다 훨씬 많았다. 지금도 도포면, 덕진면 등 행정기관 명칭이 사용되고 있지만, 이곳에는 포구를 알 수 있는 이름이 많다. 이밖에도 영산강 하류에는 사호, 금호, 당호, 청호, 용호, 이호, 장호, 산호, 월호, 백호, 양호, 동호, 맥호, 삼호 등 우리에게 익숙한 ‘湖’자가 붙은 명칭도 흔하다. 지명은 명명된 시대의 지역경관이 사라졌다 해도 그 남겨진 이름을 통해 복원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들 호수 이름들은 영산 지중해 내해 영암주변이 조수 영향권 안에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형성된 간석지들이 많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이 지역 해면 공간은 현재 영산호 수면보다 6배나 넓은 215㎢ 정도로 추정이 되고 있어 ‘영산 내해’라 칭할 만하다. 이 지역이 오랜 세월 동안 아주 서서히 매립되어 1910년 경 143㎢ 정도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이들 내해 연안 간석지들은 퇴적물이 쌓인 기름진 옥토로써 마한시대 이 지역의 중요한 경제 기반이었을 법하다.

필자가 10여 년 전 영암 독천 어느 식당에서 세발낙지를 푸짐하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석화, 낙지, 은어, 홍합, 숭어, 소금” 등의 해산물이 이 지역의 주요한 특산물로 언급되고 있다. 말하자면 조선 초기에도 낙지 등이 많이 잡혔다는 것은 갯벌이 발달한 영산 지중해 연안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마한시대에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영산 지중해 연안지역은 비옥한 농토 뿐 아니라 수문포 패총에서 알 수 있듯이 낙랑, 백제, 가야, 왜와도 교류가 활발하였다. 따라서 항구들이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었을 것이다. 시종 지역이 반남 지역보다 토기제작 시기가 앞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시종 지역이 문화 접촉이 빨랐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시종 지역이 영산 지중해 하구 입구에 위치해 있었던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때 주목되는 항구가 시종지역 바로 밑에 위치한 영암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상대포이다.

해상교통의 요지 상대포구

지난 호에 언급하였지만, 조선후기 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은 대단히 맑고 뛰어나 이른바 화성이 하늘에 오르는 산세이다. 남쪽에는 월남촌, 서쪽에는 구림촌이 있는데, 모두 신라 때 이름난 촌락이다. 이 지역은 서남해가 서로 맞닿는 곳에 위치하여 신라에서 당나라로 들어갈 때는 모두 이 고을 바다에서 배로 출발하였다”라고 구림 일대에 항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1872년 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전라도 지도’의 ‘영암군 지도’에는 구림과 함께 서쪽 물길의 수심이 3장(丈)으로 표기되어 있고, 1899년 제작된 ‘구한말 지형도’에도 구림 서편이 바다로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보면 구림 앞에는 깊이 3丈, 즉 수심이 10m 정도가 되어 큰 배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바다가 펼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은 지명만 남아 있지만 ‘상대포’ 항구가 바로 그곳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상대포’는 한국지명총람에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배척골 서쪽에 있는 마을로 백제 때부터 중국, 일본 등지와 해상교통의 요지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중대포와 하대포는 상대포 아래쪽 마을이며, 배척골은 남송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까지 배가 닿았으며, 돌정재는 배척골 북쪽에 있는 고개로 백제 때 학자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이곳에서 고향인 구림을 돌아보곤 하였다”고 적고 있다.

상대포 일대는 지형학적으로나 역사 고고학적으로 살필 때 그곳에 큰 국제 무역항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곳을 대대적으로 발굴하면 우리가 지금 막연히 추측하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많은 유적, 유물들이 분명히 나오리라 믿는다. 1990년대 말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이 이루어졌던 가야유적 복원사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곳이 큰 항구였다고 하는 것은 이곳과 아주 가까운 서호면 엄길리에 암각되어 있는 매향비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매향’은 향나무를 바닷물에 적셔 땅에 묻는 일종의 불교 행사로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났던 의식이었다. 고려 말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엄길리 암각화는 바닷가에서 매향의식이 이루어진 것과 관련지어 보면, 고려말 당시 그곳까지 조수가 들어왔다고 짐작된다. 그곳에 불교의 미륵신앙과 관계 깊은 매향 의식이 있었다는 것은 그곳을 이용하는 많은 선박들의 안전 항해와 풍요를 기원하는 기복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근 월출산 제사유적 터에서 신라 때 것으로 보이는 철제마가 출토되었다. 이 제사 유적은 바닷가에 세워져 안전 항해를 기원했던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처럼, 월출산에서 상대포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제사터가 마련된 것은 안전 항해와 풍요를 기원하는 ‘철마신앙’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구림의 상대포구는 마한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임이 분명하고 이곳을 통해 많은 문물이 교류를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왜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여 일본 사상계의 비조(鼻祖)라 일컫는 왕인박사가 높은 한학을 꿰뚫고 있었던 것도 이 항구를 통해 중국이나 백제의 신학문을 일찍 접한 결과라 하겠다. 중국에서 새로운 풍수지리학을 도입한 도선국사가 월출산 도갑사에 주석을 하고, 고려 태조의 꿈 해몽을 해준 것으로 유명한 최지몽이 영암 출신인 점도 그냥 우연은 아니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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