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와 영암(4, 끝)

학산면 매월리 生전 한국일보 기자 5·18광주민중항쟁 관련 강제해직(민주유공자 포상) 전 무등일보 주필 발행인 겸 사장

앞선 글에서 나는 나의 어머니를 살해한 공산당의 실체를 알고 싶어 공산주의 심장부 평양엘 가고 싶어 했다고 썼다. 죄라곤 예수 믿은 죄 밖에 없는 45세의 촌부(村婦)를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야만 했던 공산당의 사상적 배경을 알아보려는 것은 내 필생의 숙제였다.  “어머니!”를 불러보지 못하고 자란 한(?)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우리를 안내하는 버스에는 조선려행사의 여직원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뒤에는 정보기관원인 듯한 남자직원이 탔다. 나는 남자직원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와 제도 등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나도 그가 남한에 대하여 물어오는 것은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곤 했다. 3∼4일 동안 한 차를 타며 말을 주고 받다보니 처음엔 어색했던 사이가 어느새 정(?)도 들었다. 그가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남조선에는 자동차가 많다던데 사실이냐?”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북조선에서 고위급들이 가면 남조선이 잘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전국의 자동차들을 서울 시내로 집합시킨다는데 맞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자동차는 자기가 하는 일 중심으로 사기 때문에 여자가 직장생활을 할 경우 남편 차, 아내 차가 따로 있다며 직장생활을 하는 며느리 때문에 우리 아들 집도 자가용이 두 대라 하니 놀래는 표정이었다. 자녀가 취직하거나 대학에 다니는 경우 차를 3대까지 사는 가정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북조선에서 손님이 오니 차를 가지고 서울로 모이라” 해서 서울로 올라올 차도 없고 모이지도 않는 게 남한 사회라니 고개를 갸우뚱 했다.  

나는 공산당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알고 싶어 남한에서도 알려진 ‘주체사상’에 대해 물었다. 그는 주체사상탑을 갈 기회가 있을 거라 했다. 다음날 김일성 생가, 만경대 소년 학생궁전, 모란봉, 을밀대 등에 대한 관광과 주체사상탑을 관람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관광지 보다는 주체사상에 대한 공부였다. 주체사상을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주체사상탑에 적혀진 요지를 적는 게 정확하겠다 싶어 “그런 글이 적혀 있느냐?” 했더니 있다 해서 “메모해도 되느냐?”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나는 170m 높이의 주체사상탑 뒤에 빼곡하게 적혀진 글을 메모했다. 글을 적다가 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내가 생각하던 주체사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사람이며 가장 힘 있는 존재도 사람이다.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것도 사람을 위한 것이며 사람이 하는 일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기초이다.

여기까지 메모하던 나는 메모를 멈췄다. 어디에서 많이 본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 글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물의 결정권은 사람에게 있다.”는 ‘인내천’(人乃天)의 동학(東學)을 설명하는 글에서 본적이 있다. 그러면 “김일성 장군의 사상을 담았다.” 는 주체사상은 결국 표절이라는 말인가? 남한 사회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면서 그토록 흠모(?)했다는 주체사상이 고작 100여 년 전에 나온 최제우의 동학이론을 표절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거리의 시위를 주도하는 ‘주사파’ 학생들이 결국 짜깁기를 한 동학의 표절이론에 놀아났다는 말인가? 생각하니 이따위를 보려고 평양까지 왔나 싶고, 뭔가 매우 허탈했다. 

다음 날 버스에서 나를 안내하던 북한 직원이 조용히 만나자더니 나의 집 주소를 요구했다. “사람을 보내 선생님을 금강산 관광에 정중히 초대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걸려들었구나.”싶어 “우리를 초청한 단체, ‘한민족복지재단’에 알아보라“며 그의 청을 거절했다. 그는 계속 “선생님처럼 사회주의를 열심히 학습하는 분은 첨 봤다” 며 “이미 그 열성을  상부에 보고까지 했다”면서 거세게 졸랐다. 우리 집으로 사람을 보내 그를 따라 월북하면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난 속으로 우리 어머님 학살에 대한 복수심으로 공산당의 실체를 남한사회에 까발리려 한 것인데 공산주의를 학습하려는 사람으로 비쳐졌으니 잘못했다간 남파간첩에 이용되게 생겼구나 싶어 더욱 강하게 거절했다.

87명의 순교자를 내 전남 최다의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잃은 영암 -.그리고 월출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죽어간 순진한 좌익들-. 그들은 못나디 못난 나라에 태어난 슬픈 역사의 희생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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