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8>다양성과 개방성을 보여준 영산강 재지 세력 문화

‘영암 아리랑’으로 유명한 가수 하춘화, 바둑계에서 ‘영원한 국수’로 알려져 있는 조훈현 모두 영암 출신들이다. 이들의 몸에 배어 있는 창조적인 재능들은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영암 지역의 개방적인 분위기의 영향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서울 숭실대학교 박물관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눈에 익은 유물, 즉 국사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있었던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국보 231호 ‘용범’ 즉 ‘거푸집’이 있다. 이 유물은 청동제품을 주조하던 틀로, 한반도에 독자적인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였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그런데 이 유물이 우리지역 영암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영암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새삼 부각시켜 준다. 말하자면 이 지역이 일찍부터 영산강유역을 통해 낙랑, 백제, 가야, 왜 등 여러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영산 지중해의 거점 항구 역할을 하며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일본 스에끼 토기에 영향 준 영산강식 토기
 

일본 사카이시 출토 한반도계 토기들

몇 년 전 (사)왕인박사현창협회의 도움으로 오사카 부립 치카츠아스카(近つ飛鳥)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다. 일본 고대문화 발달에 영향을 준 마한인의 발자취를 찾기 위함이었다. 우리에게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타다오가 설계한 것으로 더 알려져 있는 이 박물관을 찾았을 때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 가운데 일본의 거대한 전방후원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百舌鳥 고분군 인근의 스에무라 도요지에서 출토된 스에끼 토기들이 영산강유역 토기들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어 반가웠다.

일본의 경질 토기인 스에끼 토기가 5세기 초 한반도로부터 전래되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는 대부분 일본 연구자들이 동의를 하고 있다. 이 토기들이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에는 가야 토기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큐슈 지역은 물론 近畿(긴끼)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보면 가야 토기는 물론 백제, 영산강 유역 등 여러 지역의 특성이 골고루 드러나고 있다. 특히 그릇 몸체에 구멍이 뚫려 있는 유공광구 토기 등에서는 영산강 유역의 특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일본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스에끼 토기는 가야뿐만 아니라 영산강 유역, 백제 등 여러 지역 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는 주장이 일본에서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영산강 고유의 특질을 간직한 유공광구 소호, 조족문 토기, 승석문 토기
국내 학계에서 영산강유역 토기를 별도로 설정하지 않고 백제계열로 포함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학자들이 영산강유역 토기를 금강 이북의 백제와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최근들어 그동안 막연히 백제계라고 일괄하여 취급하였던 토기들 가운데 양이부호, 거친무늬토기 및 이중구연토기를 만든 집단과 조족문토기, 평저의 유공광구소호 등을 사용한 집단이 서로 구별되고 있다는 연구들이 이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후자에 해당하는 조족문 토기와 유공광구 소호 등의 토기는 전형적인 영산강 유역에서 만들어진 토기로써 서울 풍납동에서 출토된 다른 토기들과 구별되고 있다.

주로 서해안의 주구묘에서 출토되고 있는 이중구연호는 전북 서해안이나 영산강하류 일대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반해, 영산강 상류와 하류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공광구소호는  전북 서해안 지역에서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영산강유역이 주 생산지였음을 알려준다. 동체가 대체로 球形이고 V字형의 목에 넓은 입(廣口)을 한 작은 항아리 형태이고 동체의 중간에 둥근 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인 유공광구 소호가 일본의 규슈와 긴끼지역 일대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은 이들 지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유공광구 소호 외에 조족문 토기도 대표적인 영산강유역 양식이라고 알려져 왔다. 평행집선문 위에 3, 4조의 사선을 배치하여 마치 새 발자국 흔적의 효과가 나오도록 토기 표면에 타날문 새긴 조조문 토기는, 경기 하남 미사리, 청주 신봉동, 나주 반남 고분 등에서 출토되고 있지만,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 집중 출토되어 영산강 유역을 대표하는 토기로 인식되고 있다. 이 조족문 토기 또한 일본의 규슈, 긴끼 일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영산강 유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조족문 토기 외에도 그동안 주로 가야 쪽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던 승석문 토기가 최근 영산강 유역 토기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가마 내의 횡치 소성 때문에 나타난 동체부의 함몰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는 이 토기는, 경남 함안 지역 토기에서만 그 특징이 보일 뿐 다른 가야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영산강 유역 곳곳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영산강식 토기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이 토기 역시 일본의 긴끼 일대에서 출토되고 있어 영산강 유역의 문화가 일본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한다.
 
영산강식 토기문화 빚어낸 영산강 토착세력

덕산리 고분 출토(좌) 신연리 고분 출토

이처럼 ‘영산강 유역식 토기’라고 명명해도 좋을 이들 토기들이 큐슈 지역과 긴끼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영산강 유역 토기가 지역의 특징을 대표하는 토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영산강유역 출토 토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토기들이 우리 지역 시종의 신연리 9호분과 나주 반남 덕산리 출토 토기 파편들에서 찾아지고 있다. 이들 출토 유물들의 器種, 器形, 문양 등을 보면 시종지역이 반남 지역보다 더 이른 문화를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쿠호카현 출토(좌), 시가현 출토(우)

시종 일대는 영산지중해 입구에 연해 있어 선진문화 수용이 내륙 반남 지역보다 용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시종지역도 반남지역 못지않은 대형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정치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두 지역의 출토 유물들의 성격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신연리와 덕산리의 영산지중해상에 위치한 연맹세력들이 하나의 단일한 정치체인 ‘내비리국’을 형성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정치체의 형성이 영산강식 토기로 상징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믿어진다.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여 개방성이 두드러진 영산강 정치체
이처럼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던 영산강유역 정치세력들은 영산강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을 법하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한 군현, 또는 중국과 교역을 했으리라고 추측되는 복골이 출토된 수문포의 패총, 일본의 하니와를 모방한 분주토기, 규슈와 가야문화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과 은장 대도 등 여러 지역의 문화교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영산강유역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지만, 이는 그만큼 영산강유역 사회가 상상 이상으로 주변지역과 문화적 접촉이 활발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영산강유역 정치체들은 재지 토착세력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문화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암 시종면 태간리에 있는 자라봉 고분이 대표적인 예인데, 전통적인 옹관고분 사회에서 일본의 거대 고분인 ‘전방후원분’과 같은 새로운 묘제를 조영하고 있는데서 당시 이 지역 지배층들의 의식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고분의 조영 시기에 대해 4세기설 또는 6세기초설 등 다양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미 신연리, 내동리 고분과 같은 대형고분을 조영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시종지역 정치 세력들이 긴끼 일대에 유행되고 있었던 거대 고분을 받아들여 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계속>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