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면 영보 生전 서광초등학교 교장한국전쟁유족회 영암부회장

6.25 사변은 우리 가정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삼촌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해 활동했다는 죄목으로 피어보지도 못한 나이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의 가족이라고 죄도 없는 내 아버님까지 경찰이 연행했다.

단란했던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어머님은 청상과부가 되시고 만 것이다. 빨갱이 집안이라고 연좌제로 묶여 감시까지 당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다.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는커녕, 오히려 죄인 취급을 당하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으며 15년의 세월이 흘러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어머님은 몸부림치셨다. 늙은 시부모와 시동생, 어린 자식을 건사하고 이끌어 갈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괴롭고 슬픈 현실을 달래줄 언덕을 찾기 위해 시설과 친지를 찾아 하소연도 해보셨단다. 모두 살기 어려운 형편이라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셨단다.

혹시 성당은 어떤 곳일까? 여러 해를 망설이다가 신부님과 수녀님의 삶을 보고 그곳에 발걸음을 하신 것이다. ‘내 딸아 빨리 오너라.’ 하고 예수님이 불러 응답한 것 같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외국 신부님의 자상함과 친절에 더 호감을 갖게 되셨단다. 입교한 첫날부터 교리문답을 암기하기 시작하셨고, 밭에서 일할 때, 논에서 김을 맬 때도 사도신경, 주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아침 저녁 기도문을 외우고 또 외우셨다고 했다. 그러기를 수개월 어려운 면접 관문을 통과하고 하느님 자녀로 탄생하신 것이다.

‘한 알의 밀알로 썩고자.’ 천주교 신자로서만이 이 어려운 가정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다는 각오를 하셨던 것 같다. 이렇게 어머님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시면서 바람 앞에 등불처럼 꺼져가려는 위태로운 가정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정신적인 계기를 마련하신 것이다. 

집에서 읍내 성당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농촌 일에 늘 피곤함에도 성당을 내 집 드나들 듯 하셨다. 큰 전례행사 때는 정성껏 한복을 차려입고 가기도 하셨다. 레지오 활동도 수년 동안 꾸준히 하시며 묵주가 언제나 손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였다. 주일미사 때는 종종 나를 데리고 가서 교우들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조부모님은 자식 둘 앞 세워놓고 생의 의욕을 잃고 시름시름 병으로 고통을 당하니 이 몫 또한 어머님의 무거운 십자가였다. 그 때는 가정에서 관혼상제의 예를 해결할 때라 동네에 초상이 나면 상복을 짓는 일이나 혼인날 주방에서 위 청상 차리는 일, 염을 하는 일, 뜨거운 불 앞에서 모시 베를 매는 일 등의 궂은 일이나 경사스런 때 중요한 일거리들이 늘 어머님의 차지가 되었다. 

그 후 어머님이 중심이 되어 몇 안 되는 마을 신자들끼리 공소를 짓게 되었다. 내가 나서서 광주 농성동 성당 신축 때 철거한 대들보를 가져와 재활용하였다. 성모상은 공소 마당 한 쪽에서 외롭고 쓸쓸하지만 지금도 도시에서와 똑같이 환한 미소로 신자를 맞이한다. 공소회장으로도 활동하시며 유교사상으로 똘똘 뭉친 마을 사람들에게 전교도 열심히 하셨다. 그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셨던 어머님 대녀들이 지금도 공소를 지키고 계신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신앙심 하나로 의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하시는 것을 보고도 나는 주님 곁으로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어머님은 기회있을 때마다 성당에 나가 주님 모시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 가족을 부르셨다. 스스로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무서운 방법으로 부른 것이다. 그 때는 미처 생각 못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주님의 부름이 확실했다. ‘어머니의 권유를 미리 받아들일 걸….’

어머님의 희망대로 우리 부부는 북동성당으로 주님을 찾아 나섰다. 어머님이 그렇게 갈망했던 신앙의 씨가 우리 부부에게도 뿌려졌다. 83년 5월 23일 하느님 자녀로 탄생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 2천년 희년 막바지에 어머님은 신자들의 정성어린 기도 속에 레지오장으로 주님 품에 안기셨다. 어머님이 고난 속에서 어렵게 찾은 신앙의 씨앗이 우리들 마음속에 뿌려져 창대하게 열매 맺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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