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서구림리 生전 조선대·광주교대강사 (문학박사)전 전라남도문인협회장아시아문화전당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작가(소설가)

80년대 초 프로야구가 막 생겼을 때,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정책에 말려들었다는 동지들의 비난 속에서도 나는 야구장을 즐겨 찾았다. 야구가 한참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관람객들에 섞여 파도타기를 하는 재미며, 운동장이 떠내려 갈듯 한 목소리로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는 재미가 넉넉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쏠쏠한 재미는 야구가 끝나고 퇴장하는 군중에 끼어 ‘김대중’을 연호하며 경찰들을 쩔쩔매게 하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프로야구를 생각하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선수가 하나 있다. 바로 ‘김성한’이다. 오리 궁둥이 타법 때문이다. 김성한은 왜 오리 궁둥이를 하고도 안타를 잘 쳤을까? 그가 야구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오리 궁둥이를 하고 타석에 들어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야구에 입문했을 당시에는 코치가 가르쳐 준대로, 야구의 교과서적인 타법대로 열심히 배우고 익혔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경지에 올랐을 때, 비로소 기본 타격자세와 상관없는 자기만의 타격자세(자신만의 문체)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필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일정한 문학적 틀에 구애됨이 없이 다양한 양식을 취할 수 있으며, 그 내용 또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로이 쓸 수 있다고 해서, 아무나 아무렇게 쓸 수 있는 글이 결코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탄탄한 문장력과 격조 높은 지성을 바탕으로 작가의 개성이나 성격을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문학이 바로 수필 아닌가? 철저한 기초 훈련 없는 야구 초년생이 오리 궁둥이를 하고 타석에 들어서면 안타를 치기는커녕 비웃음만 살 것이 자명하듯, 자칫 만만하게 보고 달려들다가는 수필이 아닌 천박한 잡문(雜文)이 될 위험이 많다.

수필과 잡문을 누드화에 빗대어 이야기 해보자.

정년퇴임을 하자마자 누드크로키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내 여자 동창이 하나 있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남자 모델도 있다던데…. 그렇지만 아무래도 누드하면 나부상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문제는 똑 같이 벌거벗은 여인을 그렸는데, 어느 것은 명화이고 어느 것은 춘화냐는 거다. 똑 같은 나부상이라고 우기면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일단 수필가가 쓴 수필인데, 어느 것은 수필이고, 어느 것은 잡문이라는 말인가? 이렇듯, 수필과 잡문을 구분하지 않고 똑같은 수필로 쳐주려 하는 것에, 바로 수필의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잡문이 되는가? 두 예화로 생각해 보자.

어떤 아주머니가 채소가게 앞에서 시금치 한 단을 가리키며 “이거 얼마요?” 하면서 표가 나게 약지 손가락을 내밀며 물었다. 물론 딸이 사준 금반지를 자랑하고 싶어서 였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채소가게 아줌마도 “니천 원이요. 니천 원” 하면서 쓸데없이 금니를 드러내 보였다. 이 금반지와 금니 자랑이 수필을 잡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짚신장사 아버지와 아들은 밤 세워가며 정성껏 짚신을 만들어 다음날 시장에 내놓았다. 그런데 웬걸 아버지 짚신은 불티나듯 팔려나가는데, 아들이 만든 짚신은 사람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몇 년을 두고 아버지 곁에서 착실히 배운 솜씨에다 누가 봐도 아버지 것과 똑같이 만들어진 짚신인데, 왜 유독 자기가 만든 짚신만 안 팔리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왜 그런지 말씀 좀 해보셔요?” 졸라댔으나 장사는 부자간에도 경쟁자라는 금도가 있는 법이라 좀에 일러주지 않았다.

그러다 무상한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고, 마침내 임종 시간이 다가왔다. 숨이 꼴딱 넘어 가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아들이 애타게 물었다. “아버지! 짚신?”하자, 기력이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진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겨우 “털”이라는 유언 한 마디만 남기고 눈을 감았다. 바로 이 털이 수필을 잡문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모든 솜씨가 다 똑같은 부자간의 짚신이었지만, 짚신을 만들고 나서 잔털을 뽑는 손질을 했느냐, 하지 않았냐가 바로 문제였던 것이다. 이는 뽑지 않은 잔털 때문에 잡문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두 예화는 곧 ‘관객에게 배우로 들키지 않는 배우가 명배우’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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