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7>마한 남부 연맹의 패자, ‘침미다례’(하)

해남 용두리에는 길이가 80m 가까이 되는 거대한 전방후원분 즉 장고분이 있다. 이는 그곳에 적어도 그러한 고분을 조영할 힘을 가진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의 피장자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필자는 재지세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문제는 별도로 언급할 예정이지만, 그렇다면 지난 호에 언급되었듯이 차령산맥 이남 지역의 마한남부 연맹을 대표하며 반도 서남부를 장악했던 ‘침미다례’ 왕국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남지역의 대형 고분군과 영산강유역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10여기 이상의 대형 전방후원분을 조영할 정도의 힘을 가졌던 마한남부 연맹체의 왕국들이 왜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역사에서 기록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까? 

독립성을 인정한 수평적인 연맹체
일찍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고구려 유이민 세력과 한강유역 토착세력이 결합되어 성립한 백제 왕국은, 낙랑·대방 등 한 군현 세력과 끊임없는 군사적인 충돌을 경험하며 한강유역의 맹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주변 세력들을 강력한 군사 기반을 바탕으로 아우르며 팽창을 하다 마침내 마한의 맹주를 자처한 목지국까지 무너뜨렸던 것이다.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 군대를 평양성 전투에서 격파할 때 동원된 3만의 군사력이 이러한 정황을 알려준다.

하지만 ‘침미다례’ 중심의 남부 연맹체들은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다른 마한 연맹체들이 그러하듯이 대·소국 왕국 간에 세력규모가 비슷하여 정치 세력들의 독립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산곡(山谷)간에 위치하여 대·소국간의 인구 편차가 커 정치세력 간의 우열이 비교적 뚜렷이 나타난 진한 지역과는 달리 마한지역은 평야 지역에 위치하여 대·소국 간의 인구 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은 이를 반영한다. 3세기 후반 경의 정치 세력의 존재를 알려주는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지역의 대형옹관 고분들은 개별적으로는 강한 정치체의 존재를 암시해주기도 하지만 각기 강한 분립성을 드러내주는 이 지역 연맹 왕국의 실체를 알려준다.

유난히 영산강유역의 마한남부 연맹 정치체들이 분립성을 많이 띠고 있는 까닭은 광주 신창동 등 영산강유역 곳곳에서 철제 농기구보다 목제 농기구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들 지역은 황토 위주의 구릉지대가 많아 3~5세기 까지만 하더라도 굳이 철제 농기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목제 농기구를 사용하고 있어 자급자족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철제 농기구 유물이 많이 출토된 같은 시기의 가야 지역과 비교된다. 말하자면, 철기 제작과 분배를 통한 사회발전 동력이 낮아 권력과 부의 집중화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비록 정치적 수장이 있다고 하나, 마한은 서로 잡거(雜居)하며 정치적 수장의 통제력이 약하고 성곽이 없었다는 위서 동이전의 기록이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옹관묘가 가족묘와 공동묘의 형태가 많은 것도 권력이 집중된 강력한 수장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남해안 일대에서 마구(馬具)와 같은 유물과 성곽 등이 보이지 않은 것도 조사 부족이라기보다는 이러한 현상을 반영한다. 게다가 한 군현과 끊임없는 군사적 충돌을 경험한 백제처럼 외부의 강한 군사적 압력에 저항하였던 경험도 없어 연맹왕국들 간에 강한 결속력 내지는 통합의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다.  

군사 대국 백제의 압력을 이겨내다
이러한 분립성은 통합력이 미약하여 외부의 강한 압력 앞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백제 근초고왕이 ‘침미다례’를 공격할 때 고사 등 노령산맥 이북의 일부 연맹왕국이 '自然' 항복했다고 하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반면, 노령산맥 이남 지역은 근초고왕의 강습에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들 연맹체가 비록 분립성이 강하다 해도 상당한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한다. 후술하겠지만, 영산강유역 곳곳에  대형 전방후원분이 비슷한 형태로 조영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연맹체간의 결속을 보여주는 작은 징표라고 본다. 

백제가 369년 ‘침미다례’ 왕국을 공격한 까닭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371년 겨울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사실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남하 정책을 본격화하고 있는 고구려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백제는 후방의 안전 확보가 시급하였을 법하다. 신라를 공격하여 고구려와 군사적 동맹을 맺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가야 지역까지 공략한 근초고왕은 백제 연맹체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마한 연맹체를 대표하는 왕국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침미다례’ 왕국을 ‘남만’이라 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백제는 침미다례가 고구려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도륙’이라는 표현을 쓰면서까지 강한 군사적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노령산맥 북부지역 일부만 백제의 강습에 항복한 사실로 볼 때, 근초고왕 군대에게 입은 ‘침미다례’ 왕국의 타격이 ‘도륙’이라는 기록만큼 치명적이지 않았다고 본다. 이는 노령산맥 이북지역의 고고학적인 유물에서도 백제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공격은 일회성 강습에 불과했다고 여겨진다.

특히 노령산맥 이남지역에서 백제의 영향과 무관한 토착세력이 연맹왕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는 것도 근초고왕 공격의 한계를 보여준다.

토착적 전통에 독자적 문화 형성
목지국까지 복속시켰던 백제가 ‘침미다례’ 연맹체를 무너뜨리지 못한 까닭은 이 지역에 뿌리내린 강한 토착성 때문이었다고 믿어진다.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 세력과 토착세력이 결합하여 성립된 연맹왕국인 삼한은 그 과정에서 정치적, 문화적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형성된 '별읍'이나 ‘소도’의 존재는 삼한 사회의 독특한 사회 모습이다. ‘별읍’이 삼한 지역에만 있었다는 것은 유이민 세력이 비록 지배세력을 형성하였지만 토착세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더욱 전남지역은 높은 노령산맥이 가로 막고 있는데다 서해연안 항로 또한 고조선, 낙랑 등과 떨어져 있어 북쪽에서 철기문화를 가지고 내려온 유이민 세력이 토착세력을 압도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유이민 세력들이 독자적으로 정치적 통솔력을 가지면서 자기 세력을 확충해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오히려 토착민에게 흡수 동화되었고, 특히 노령산맥 이남의 연맹왕국들은 외부의 문화적 요인이 용해된 토착적 전통이 강하게 간직되고 있었다.

삼국지 위서의 기록에 “그 북방의 군(郡)에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예속을 알았으나, 그 먼 곳은 마치 흉도와 같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지리적으로 한 군현과 떨어져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토착문화가 강고하였음”을 보여준다.

한 군현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침미다례’ 왕국은 강하게 형성된 토착적 전통에 낙랑과 변한, 왜 등의 여러 문화 요소들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독자적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해남반도의 고분 형태 등이 영산강 유역과도 차이가 있는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백제의 거대한 물결을 이겨내며 고유한 전통을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영산강 유역의 고분군의 형태와 유물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화 요소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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