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면 몽해리 아천 生경기대 언론미디어학과 외래교수 가나 문화콘텐츠그룹 부회장전 KBS제주방송국 총국장

지난 8월 한 달은 어느 해보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영화 한 편이 이 무더위 속에 우리들의 지난 과거의 아픈 충격을 뒤돌아보게 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광주민주화 운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지난 8월2일 개봉되어 한  달이 넘는 지금도 전국에서 높은 1천200만명의 관람객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 영화 주인공인 택시운전사역의 송강호는 밀린 월세를 벌겠다는 일념으로 광주 현장을 취재하려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택시에 태웠다. 두 주인공이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비는 가운데 감정적 밀고 담김, 갈등과 화해, 위기와 반전이 계속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택시를 매개로 이루어지면서 현실감과 공간감이 증폭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목격하면서 광주의 진실을 보고, 우리들에게 눈물로 각인시켜 주었다. 두 사람은 광주로 갈 때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

독일 기자 힌츠페터가 광주 비극을 기록한 비디오테입을 들고 한국을 빠져나가기 위해 김포공항까지 달릴 때는 뜨거운 동지로 하나가 된다. 광주의 진상이 독일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다시 우울하게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용산 CGV에서 광주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고인이 된 독일기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80) 여사와 배우 송강호, 유해진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광주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다며 아직까지 광주의 진실이 규명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과제라며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필자는 이 영화의 현장인 당시 광주에서 KBS기자로 취재활동을 해 남다른 감회가 있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시의 광주현장을 취재 중 죽음을 위협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함께 관람했던 아내 몰래 울먹일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당시 KBS 기자들이 1년씩 지방에 근무하는 제도에 따라 1979년 8월 KBS광주방송총국에 사건 취재기자로 근무했다. 때문에 필자는 광주에서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후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할 수 있었다. 당시 광주민주화운동 핵심 10일간의 주요 내용이다.

▲5월17일: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5월18일: 계엄군, 전남대학생 무력진압 ▲5월19일: 계엄군, 무차별 폭력시민군 검거 ▲5월20일: 시민군 버스이용 차량시위 확산, 계엄군이 시민대상 무차별 총기 난사, 광주 MBC사옥 전소 ▲5월21일: 계엄군, 시민군 집단 발포 계속, 시민군에 의한 광주장악 및 총기 확보, KBS광주사옥 전소 ▲5월26일: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진입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 시민군 전원 사살 및 도청 점령, 계엄군이 광주시내 장악후 작전 종료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는 언론의 모든 기사는 광주 계엄사령부의 사전 검열을 통과해야만 보도되었다. 당시 KBS광주 낮 12시 뉴스는 계엄사의 사전 기사검열이 늦어져 아나운서들이 기사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해 생방송 뉴스진행에 애를 태웠다. 당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서울본사 9시 TV뉴스 리포트는 필자가 전담했다. 광주지역에 전화와 통신이 차단되기 전까지 KBS광주 현장뉴스는 계엄군의 보도 검열 때문에 광주시민군에 불리한 편파보도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전남일보 사옥 전면에는 “편파 보도한 KBS 윤재홍 기자를 죽여라”는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 직원이 필자에게 “매우 위험하니 몸 조심하라”며 알려주어, 광주거리를 나설 때 안경을 벗고 검정색 분장까지 하며 위험한 취재현장을 다녔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되면서 현장보도가 중단되었다. 그야말로 광주에는 언론이 없었다. 방송과 신문 등 서울에서 온 언론사들은 광주 외곽 출장소에서 특별 취재반들을 구성해 광주 현장을 취재해 서울에 겨우 송고했다. 하지만 필자는 광주시내에서 취재한 기사를 서울에 송고할 수 없어 그 내용을 기자수첩에 빼곡이 기록할 뿐이었다.

5월20일 밤 광주MBC 사옥이 전소된데 이어, 다음날 21일 새벽 4시쯤 KBS광주 사옥도 전소되었다.  KBS광주 사옥이 전소된 전날 밤 야간당직을 맡았던 필자는 시민군들이 KBS사옥을 불 지르기 위해 화염병을 들고 공격하는 순간 사옥안에 갇혀 화장실 수도 꼭지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겨우 숨쉬며 장시간 동안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공포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보도되지 않은 광주현장 취재내용들이 필자의 취재수첩에는 가득했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시민군 사살, 도청 탈환 후 시민군 150여구의 시체를 확인, 오열하는 유족들의 스케치, 광주시 부녀자들이 시민들에게 주는 주먹밥, 수습대책위원회 발족, 시민군들의 무기 자진반납, 병원마다 헌혈하는 인파 등이다.

30대 청년 기자에서 7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감상하면서 아직도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는 언론인이 된 것이 부끄럽고 안타깝다. 이 영화는 1980년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이 재정립되고 우리가 은연중 외면했을지 모를 아픈 현대사를 응시할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픈 역사를 딛고 새로운 비젼과 희망이 있다면 “광주에는 언론이 없었다”는 말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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