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결혼할 때 ‘탈선(奪扇)’이란 게 있었다. 탈선은 결혼식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장가가는 신랑의 부채를 빼앗는 전통혼례 문화의 일종이다. 탈선은 결혼식 날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 집으로 가다 동네 어귀에서 내려 그 동네 청년들과 맞닥뜨려 실랑이를 하는 한판 승부로, 텃세나 기 싸움 같은 놀이라 할 수 있다.

동네 청년 : “何行何此 誰官(하행하차수관)이라 여쭈어라”
동네 하인 : “어디서 어디로 가느냐고 여쭈십니다”
신랑 : “춘양리에서 역리로 간다고 여쭈어라”
신랑 하인 : “춘양리에서 역리로 간다고 여쭈십니다”
동네 청년 : “용건이 무엇이냐고 여쭈어라”
동네 하인 : “무엇 때문에 가느냐고 여쭈십니다”
신랑 : “김선생댁 셋째 딸을 데리러 왔다고 여쭈어라”
신랑 하인 : “김선생댁 셋째 딸을 데리러 왔다고 여쭈옵니다”
김선생댁 셋째 딸 결혼식 날, 동네 어귀에선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진다. 등장인물은 신랑과 동네에서 말께나 한다는 청년, 메시지 전달자(하인) 각 1인 등 4명이다.
동네 청년 : “남의 마을에 꽃을 꺾으려는 것은 도둑이 아닌지 여쭈어라”
동네 하인 : “도둑이 아닌지 여쭈랍니다”
신랑 : “나비가 꽃을 찾는데 어느 건방진 놈이 길을 막느냐고 여쭈어라”
신랑 하인 : “나비가 꽃을 찾는데 건방지다고 여쭈랍니다”
동네 청년이 말문이 막히면 동네 창피는 다 사는 것이다. 구경꾼은 모두 같은 동네 사람으로 한통속이다. 어떻게 하던 말싸움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쯤해서, 동네 청년은 매우 어려운 말을 꺼낸다. “녹재하중이라 여쭤라”
신랑은 생전 듣지도 보지도 않은 어려운 말이기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때, 동네 청년은 기선을 잡고, “모르면 무릎 꿇고 배우라고 여쭈어라”면서 당당한 기세로 신랑을 제압한다.

마침내 신랑은 청자담배 한 갑을 내밀며 “이것이면 되겠냐고 여쭈어라”한다. 동네 청년은 “날아가는 기러기도 쌍쌍이라고 여쭈어라”고 불만을 토로하고, 신랑은 “백주에 도둑도 이만부덕 아니냐고 여쭈어라”며 화답한다. 곧이어 동네 청년이 “원앙도 짝이 있고, 고무신도 한 짝은 신을 수 없다고 여쭈어라”고 실토한다.

결국, 신랑은 하는 수 없이 청자담배 두세 갑을 빼앗기고 팽팽하게 벌어지던 탈선놀이 말싸움은 끝나게 된다.

그런데, 탈선놀이 말싸움 중에 비장의 무기로 사용한 ‘녹재하중’이란 사자성어의 뜻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녹재하중’이라는 사자성어는 이 세상에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조건 우겨서라도 이겨야한다”는 동네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동네 청년은 ‘가짜 사자성어’를 화두로 던져 승리 아닌 승리를 한 것이다.

이렇게 탈선 게임이 끝나면, 신랑은 신부 댁으로 입성하고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여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내 고향 동네에서 전통 결혼식이 있던 날, 벌어진 풍경이다. 우리 동네에는 탈선을 전문으로 맡는 청년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존경스러웠다. 그는 탈선 말싸움이 절정에 달할 때면, 의례히 ‘녹재하중’이란 말을 단골로 사용해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했기에 당시엔 매우 유식(?)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탈선 말싸움이 지적 수준의 대결이 아니고 유머와 개그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된 후였다. 더불어 탈선의 결과는 신부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처지라 다툼에서 져주는 것이 상례이고, 신부 댁에서는 탈선 객들을 푸짐한 술상을 차려 대접하는 것이 전통혼례의 관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탈선이 변질하여 오징어 탈을 쓰고 “함 사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된 것도 옛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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