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

  <6>마한 남부 연맹의 패자, ‘침미다례“(중)

 

백제국에 버금가는 세력 형성하다
영산강유역에 있는 많은 장고분의 성격을 가지고 논란이 많다. 특히 피장자의 성격을 둘러싸고 재지 토착 세력설, 왜계 관료설, 망명 왜인설 등 백가쟁명이 전개되고 있다. ‘침미다례’가 위치한 해남 반도에는 장고산 고분처럼 거대한 장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재지 토착설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거대한 고분을 축조할만한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우지만, 엄연히 ‘침미다례’와 같은 대국(大國)이 존재해 있었다. 따라서 장고분 피장자의 성격과 관련된 기존 학설은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국 영산강유역 정치 세력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확인한 셈이다.

지난 호에 언급했지만, 3세기 말 중국에 조공을 하러 간 29국의 제일 앞에 ‘신미국’ 즉, ‘침미다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침미다례’가 마한 연맹체의 중심 세력임은 분명하다. 이 무렵은 시기적으로 보면 자칭 ‘진왕’, 또는 ‘마한왕’을 자처하며 마한의 맹주 노릇을 하였던 목지국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주도권을 상실한 직후였다. 따라서 ‘침미다례’를 비롯하여 연맹체들이 중국에 조공하러 간 것은 이와 무관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침미다례’와 함께 한 29국에는 노령산맥 이남지역에 있는 13국은 물론 차령산맥 이남 즉 목지국 이남의 정치세력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침미다례’는 목지국이 강성해있을 때도 목지국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목지국이 전체 연맹에 대한 영향력이 컷을 것이라고 여겨왔던 기존 인식과 달리, ‘침미다례’가 목지국은 물론 백제국에 버금가는 세력을 형성하면서 3세기 중엽부터 1세기 이상 한반도 남부에서 마한연맹의 또 다른 맹주로 우뚝 서 있었던 셈이다. 목지국이 백제에 밀려 남하하며 나주 일대에 목지국의 잔여세력이 독립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일부 의견은, ‘침미다례’와 같은 대국 중심의 연맹체를 간과한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침미다례는 3세기 중엽 목지국이 붕괴되고 백제가 연맹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자 그것에 반발하는 다른 연맹체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있었다. 침미다례 중심의 연맹체가 지역적으로 노령산맥을 넘어 지금의 전북일대 즉 차령산맥 이남까지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공격 때 항복했던 일부 연맹왕국들이 전북일대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침미다례’를 도륙하자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布彌)·지반(支半)·고사(古四) 등 읍락이 자연 항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사는 고부, 벽중은 김제, 지반은 부안, 비리는 부안의 보안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견해를 따를 경우, 모두 노령산맥 이북에 해당한다. 적어도 4세기 중엽까지 전북지역 대부분은 백제 중심의 연맹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전북지역은 별도의 정치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노령산맥 서쪽의 전북 서남부권이 영산강유역과 같은 성격의 고분을 축조하는 것에서 전북지역에 별도의 정치체가 결성되어 있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영산강 세력권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살피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여하튼 백제의 세력은 4세기 중엽까지는 차령산맥 이남까지 미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침미다례와 백제를 맹주로 하는 두 개의 마한 연맹체가 차령산맥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대치하며 마한의 정통성 계승을 둘러싸고 경쟁과 갈등 관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백제와 치열한 외교전을 전개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침미다례 중심의 연맹체는, 백제가 강력하게 남하정책을 추진하며 압박을 가하자 이에 적극 대처하였다. 그것이 장화전의 ‘여러 대에 걸쳐 찾지 아니하였다(歷世未附)’라는 기록처럼 그동안 방치 상태에 있었던 중국과의 외교 복원에 총력을 기울였다고 본다. 무려 29개국이나 되는 많은 나라들이 함께 조공에 나섰다고 하는데서 짐작된다. 이를 가지고 280년 서진(西晉)이 중국을 통일한 후 대내적인 물자조달이 가능해져 원거리 무역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여 교역량이 감소하고 외래물품에 대한 수요 때문에 침미다례가 원거리 무역에 적극 나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침미다례’의 경제기반이 대외무역에 의존하였을 때 가능한 해석이지만 농업과 어업에 기반을 둔 왕국이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가지 않는다. 더구나 29개국이 함께 갔다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더욱 절실한 까닭, 이를테면 마한 연맹체의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외교전의 산물로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최근 목지국 멸망 후의 마한이 침미다례 중심의 연맹체와 백제 중심의 연맹체로 나누어져 대립 경쟁하고 있었다고 살핀 연구가 나오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시사적이다.

농·어업 기반 독자적 세력 형성하다
이렇듯 목지국에 버금가는 대국이 강진만과 해남반도 일대에 형성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지금도 전남지역의 가장 넓은 충적평야 지대에 위치한 강진만과 해남반도는 전남지역의 쌀 생산의 15%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옥한 농토지대이다. 이를테면 침미다례의 영역에 해당하였던 송지면과 현산면 경계를 흐르는 구산천과 군곡천, 산정천 등 하천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농업 생산력은 당시의 경제력을 상상하게 한다.

게다가 군곡리 패총이 자리 잡은 해남 백포만 일대는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문헌에도 갈산포·어란포·남포·군곡포 등 여러 포구이름이 보이는 등 지형적으로도 항만이 발달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를테면 지정학적으로도 L자 모양의 반도 서남단에 위치하여 중국, 낙랑, 가야,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무역의 중간 교역지 기능을 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실제 군곡리 패총에서 출토된 중국 신(新)나라 화폐인 ‘화천(貨泉)’과 중국과 왜에서 사용되었던 점술 도구인 '복골(卜骨)', 해남 부길리에서 출토된 가야 계통의 철제품은 당시의 사정을 짐작해준다. 이를테면 그 지역이 기원전 2세기 경부터 기원 후 4세기 무렵까지 낙랑, 대방에서 마한, 변한을 거쳐 왜로 이어지는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삼국지 위서의 기록을 입증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때 침미다례의 주요한 경제기반은 농업과 어업의 비중이 컸을 것이다. 이를테면 침미다례가 적극적인 대외 무역활동 보다는 중계무역 거점역할을 하며 경제적 이익을 취하여 성장의 토대를 삼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오랫동안 중국과 사신 왕래가 없었다고 하는데서 추측할 수 있다.

여하튼 ‘침미다례’ 왕국은 비옥한 농토와 중계무역을 통해 축적된 경제적 부와 이른 시기부터 낙랑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접해 다른 연맹왕국 보다 빠른 정치적 발전을 하였을 것이다. 백포만 일대의 넓은 주거지 유적과 야철지 및 토기요지, 합구식 대형옹관 등에서 유력한 정치적 수장층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 특히 해남일대의 옹관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철도끼, 철촉, 철정 등의 무기류가 영산강유역의 다른 지역보다 많은 것도 이 지역에 자리 잡았던 ‘침미다례’ 왕국이 삼국지 위서에서 말한 '대국'을 형성하여 마한연맹의 중심세력이었다는 증거라고 여겨진다. 실제 해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해안 고분형태가 영산강 유역과 달리 나타나고 있는 것은 ‘침미다례’ 중심의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반영해준다고 생각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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