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와 영암(3)

평양에서의 첫 밤을 보내고 새벽 기도회 가는 습관의 시간에 잠이 깼다. 함께 방을 쓰는 목사님도 그 시간에 일어나셨다. 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꼬끼오- 꼭!” 새벽을 알리는 수탉 울음소리가 길 건너편 아파트 곳곳에서 들렸다. 통일원에서 교육받을 때 평양에 다녀온 분의 말이 생각이 났다. 사회주의 나라의 현실을 보려면 북한의 고층 아파트에서 울려 나오는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안다고 했던가?

날이 밝아 건너편 아파트를 자세하게 살폈다. 아파트 뒤 베란다를 스레트로 덮고 그 안에 닭을 키우고 있었다. 고급 아파트인 듯 한데 거의가 닭을 키우고 있었다. ‘같이 일하고 공평하게 나눠 먹고 산다.’ 는 공산주의의 가치관이 ‘자기 사는 공간에 닭이라도 키워야 자유롭게 달걀과 닭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현실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6월 15일은 음력으로 5월 5일, 단오절이었다. 북한은 음력설과 단오절, 추석 등을 3대 명절로 쇤다고 했다. 아침 식단에 찰 쑥떡과 깊은 산속에서만 난다는 곰취나물, 완두콩 죽이 올랐다. 아침을 먹고 나서도 일정에 대한 연락이 없어 1층 로비에 내려가 보니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꽃을 피웠다. 우리를 태운 버스에서 안내했던 여직원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 북한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봤다.

“호텔 관리원 동무가 어제 밤에 본건데 남한 사람들의 취향이 저질스럽다.”고 했다. 지저분한 호텔 변소의 사진을 신선한 카메라로 마구 찍었다는 것이다. 첫 날 순안공항에서 화장실을 체크 했던 게 생각나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고려호텔의 지저분한 화장실을 찍다가 여자 청소원에게 들킨 모양이었다. 점심 때까지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최초의 민간 전세기로 우리를 입국토록  주선한 단체는 중국 북경에 본부를 둔 북한의 범태평양위원회(이하 범태)인데 범태는 ‘아리랑 축전’은 희망자에 한해 개별적으로 관람키로 했었단다. 그러나 아리랑축전위원회(이하 위원회)는 북한에 입국한 단체는 아리랑축전 단체관람이 의무라며 단체 관람을 하지 않으려면 한국으로 되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범태와 위원회가 서로 기싸움을 하는 이른바 북북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이 약속한 ‘6ㆍ15 선언 2주년 기념예배’를 봉수교회에서 드리기로 한 날이어서 식당에 내려갔더니 사무총장 김형석 박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어젯밤 북한 고위층으로부터 ‘아리랑 축전’을 선별 관람하겠다는 단체에는 약속을 들어 줄 수가 없다며 아침 8시까지 버스를 고려호텔 정문 앞에 댈 터이니 묘향산 관광을 다녀오라고 통보를 해왔다는 것이다. 6ㆍ15 선언 2주년 기념예배를 위해 온 목사 장로더러 주일 예배 대신 관광을 가라니 북한은 기독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무식한 나라’였다. 사무총장 김형석 박사는 “그동안 순교를 각오하고 평양을 드나들면서 어려운 형제들을 도와 왔는데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해 준비하셨나 모르겠다.” 며 순교를 각오하고 북한의 부당한 요구를 저지하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남한의 내로라하는 거물급 목사들이 사무총장을 거들고 나섰다. 순서를 나눠서 맡아가며 즉석부흥회가 열렸다. 설교와 찬양. 찬송을 호텔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불러댔다. 일종의 시위였다. 그것도 공산당의 수도, 평양의 한 복판에서….

난리가 났다. 호텔 로비에 모인 수 백 명의 남한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라”며 거리로 뛰쳐  나갈듯한 움직임에 북한 당국자들이 적잖이 놀래는 것 같았다. 북한의 고급 관리들이 속속 호텔을 드나들며 사태수습에 나서는 듯 했다. 아마 최고의 실권자인 김정일 위원장만 빼고 다 온 듯 했다. 우리는 그런대로 호텔로비에서 주일 예배를 성대(?)하게 드리고 호텔의 빵과 포도주로 성찬식까지 했다. 북한은 손을 들었다. 약속대로 희망자에 한해 관람토록 했다. 공산주의와 공산당의 실체를 찾아 알기 위해 북한을 간 나는 아리랑 축전을 관람했다.

5ㆍ1 경기장에서 10만 학생들이 그려내는 아리랑 축전은 장관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만이 가능한 일이라 생각이 들면서도 10만 명의 움직임이 한 사람의 움직임처럼 동영상을 그려내는 카드섹션은 “아름답다.” 는 찬사 이전에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기계처럼 움직였다.
<계속> 

저작권자 © 영암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